| [교단일기] “검으니까 검다고 하지요”
나른한 봄날인 데다 점심을 막 먹고 난 뒤의 5교시 수업이라 그랬는지 눈에 졸음이 잔뜩 묻어 있는 아이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그중 한 아이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보드마커를 들이밀며 이렇게 물었다.
“여기 이 보드마커가 무슨 색깔로 보이냐?” “예? 거, 검은색인데요.” “그래? 너도 검은색으로 보이는 모양이구나. 나도 검은색으로 보이는데.” 검은색 보드마커가 검은색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거늘, 그것이 이상하다는 투로 말하고 있는 선생을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
나는 몸을 돌려 전체 아이들을 향해 다시 물었다. “여러분들도 이 보드마커가 검은색으로 보입니까?” “당연하죠. 검은색이잖아요.” 그런 물음을 던지기 전부터 입이 근질거린 것이 분명한 한 아이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이다.
일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음을 내심 즐기며 시치미를 뚝 떼고 말을 이어갔다. “봄에는 몸이 나른해지면서 정상적인 사람도 붉은색이 검은색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온도가 높아지면서 시각을 관장하는 호르몬이 과다 방출되기 때문인데, 봄철 기온이 갑자기 높아지는 오후 2시께 그런 현상이 심하고 합니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해서 보면 다시 본래의 색깔로 보인다고 하네요. 자, 정신을 집중하고 다시 한번 보세요. 어떻습니까? 이 보드마커가 무슨 색깔로 보입니까?” “검은색으로 보입니다.” 아이들의 대답은 즉각적이고 단호했다. “검은색이 아니라는데 왜 자꾸 검은색이라고 하죠?” “검으니까 검다고 하지요.” 나는 이쯤해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물었다. “왜 저는 여러분을 속일 수 없었을까요? 선생님은 여러분보다 더 많이 배웠고, 문학을 좋아해서 말도 좀 잘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속이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고,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느라 눈알을 굴리고 있던 한 아이의 눈빛이 차츰 진지해지더니 이렇게 말을 했다. “그건, 보드마커가 검은색이기 때문입니다.” 정답이었다.
너무 쉬워서 더 난해할 수도 있는 답을 용케도 알아맞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검은색을 검은색이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학식이 높고 머리가 명석하고 말솜씨가 뛰어나도 검은색을 붉은색이라고 속이기는 어렵습니다.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거나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여러분처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 옳게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전날 밤, 나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국회의 대통령 탄핵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한 유명작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대다수 국민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과 붉은색의 차이는 너무도 분명한데, 내로라하는 최고의 지식인인 그가 검은색을 붉은색이라고 우기는 형국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정말 검은색을 붉은색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문득 아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고만고만하여 최고와는 거리가 먼 보통 아이들. 나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세상을 보는 올곧은 눈을 갖기만 한다면 최고를 부러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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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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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선생님의 교단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