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어머니,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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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1.09.05. 오전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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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이소선 여사 빈소의 영정 앞에 국화가 놓여있다. 고인은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였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ㆍ이소선 여사 타계… 7일 영결식

“이제 호흡기를 떼겠습니다. 사망시간은 오전 11시45분입니다.”

3일 오전 서울 쌍문동 한일병원 중환자실에 깊은 정적이 흘렀다. 강종렬 흉부외과 주임과장이 이소선 여사의 숨을 지탱하던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 혈압과 맥박을 나타내는 화면의 수치가 ‘0’으로 바뀌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는 고단하던 생을 여든두 해로 마감했다. 맑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창밖의 서울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이날 오전 8시쯤 갑자기 이 여사의 심장에 이상이 왔다. 의료진이 인공호흡기로 이 여사의 마지막 숨을 붙들고 있는 동안 가족과 지인들이 모여들었다. 아들 전태삼씨(61)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어머니가 지금 돌아가실 것 같아요.”

평소 바람대로 손주사위 조일 목사(33)가 임종 예배를 시작했다. 병상 곁에 선 전태삼씨는 눈을 꼭 감은 채 말이 없었다. 며느리 윤매실씨는 성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작은딸 전순덕씨(53)는 어머니의 다리를 계속 주물렀다. 피 한 방울이라도 더 돌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한 표정에 배어 있었다.

맏딸 전순옥씨(57)와 영국인 사위 크리스토퍼 조엘(68)은 함께 찬송가를 불렀다. 생전 각별한 인연을 맺은 장기표 전 전태일재단 이사장(66)을 포함해 가까운 지인들도 임종을 지켰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아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 자살한 뒤 고인은 40년이 넘는 세월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아왔다. 청계피복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하고 경찰과 정보기관에 쫓기는 수배자들을 숨겨주다 세 차례나 옥살이를 했다. 권위주의 시절뿐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도,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싸우는 모든 이들 곁에는 그가 있었다.

이 여사는 지난 7월18일 심장 이상으로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처음 입원한 서울대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했다’는 판정을 받은 뒤 최근 병실을 한일병원으로 옮겼다. 20년 동안 주치의 역할을 해온 김응수 한일병원장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지만, 결국 열흘 만에 눈을 감았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진다. 고인은 7일 영결식 후 전태일 열사가 묻힌 경기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된다.

<김형규·박은하·정희완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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