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글 나눔 | 5.18,광주,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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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지회 작성일23-05-31 17:00 조회78회 댓글0건본문
5.18. 광주. 민주주의
박이선(글나누리)
5.18 민중항쟁이 있었던 1980년, 나는 고3이었고 대학 본고사 준비로 정신없는 5월을 보내고 있었다. 영어 독해와 수학 증명 문제를 풀고 짬짬이 체력장도 준비했으니 지금 고3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7월 30일, 본고사를 보지 않는다는 뉴스와 고3 내신 성적을 5단계로 구분해 대학입학고사만 본다는 소식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지 뭐 하면서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때 모두 가만히 있었을까 싶다. 독재 정권은 이렇게 국민의 일상을 폭력적으로 다루었고 누구하나 저항하지 못했다. 이듬해 대학에 들어가 광주를 알게 되었다. 내가 언론을 통해 알고 있던 것과 너무나 다른 사실에 분노했다. 그리고 43년을 맞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5월이 왔고 나는 광주에 빚진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 가자 광주지부에서 하루 기행을 준비한다니 함께 하기로 하였다.
19일 밤에 용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광주 송정역에 내려 하룻밤을 보냈다. 20일 망월동 묘역은 화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참교육학부모회 이름으로 분향을 하고 묘역을 돌아보았다. 살레시오고 서부원 선생님이 안내를 해주셔서 윤상원 열사, 송기숙 선생님, 이영희 선생님 등등을 만나 뵙고 백남기 농민, 이한열, 김남주 시인 등이 잠들어 계신 구 묘역도 돌아보고 도청으로 향했다.
도청 앞 전일빌딩은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리모델링을 거쳐 전일빌딩 245로 재탄생되었다. 245는 헬기로 사격해서 남은 총탄 흔적 개수다. 5분 남짓 한 영상은 80년 5월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옥상에 오르니 도청 앞 분수대와 금남로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태극기가 놓였던 분수대도 그대로 있었고 전두환이 그렇게 싫어했다는 시계탑도 시민들이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아 매일 5시 18분이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고 한다. 매주 도청 앞 광장은 차 없는 거리가 되고 시민들이 벌이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광주는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소중함, 시민들의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 지 일깨우고 있다. 자치구, 네트워크 단위로 추모행사가 이루어지고 주민들이 참여해 즐겁게 5,18 광주를 체험하고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43년 전 광주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를 되새겨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몸은 피곤하고 힘들었으나 마음만은 꽉 찬 하루였다. 요즘과 같은 시국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귓전에서 맴돌고 광주민중항쟁의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왔다.
박이선(글나누리)
5.18 민중항쟁이 있었던 1980년, 나는 고3이었고 대학 본고사 준비로 정신없는 5월을 보내고 있었다. 영어 독해와 수학 증명 문제를 풀고 짬짬이 체력장도 준비했으니 지금 고3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7월 30일, 본고사를 보지 않는다는 뉴스와 고3 내신 성적을 5단계로 구분해 대학입학고사만 본다는 소식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지 뭐 하면서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때 모두 가만히 있었을까 싶다. 독재 정권은 이렇게 국민의 일상을 폭력적으로 다루었고 누구하나 저항하지 못했다. 이듬해 대학에 들어가 광주를 알게 되었다. 내가 언론을 통해 알고 있던 것과 너무나 다른 사실에 분노했다. 그리고 43년을 맞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5월이 왔고 나는 광주에 빚진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 가자 광주지부에서 하루 기행을 준비한다니 함께 하기로 하였다.
19일 밤에 용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광주 송정역에 내려 하룻밤을 보냈다. 20일 망월동 묘역은 화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참교육학부모회 이름으로 분향을 하고 묘역을 돌아보았다. 살레시오고 서부원 선생님이 안내를 해주셔서 윤상원 열사, 송기숙 선생님, 이영희 선생님 등등을 만나 뵙고 백남기 농민, 이한열, 김남주 시인 등이 잠들어 계신 구 묘역도 돌아보고 도청으로 향했다.
도청 앞 전일빌딩은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리모델링을 거쳐 전일빌딩 245로 재탄생되었다. 245는 헬기로 사격해서 남은 총탄 흔적 개수다. 5분 남짓 한 영상은 80년 5월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옥상에 오르니 도청 앞 분수대와 금남로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태극기가 놓였던 분수대도 그대로 있었고 전두환이 그렇게 싫어했다는 시계탑도 시민들이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아 매일 5시 18분이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고 한다. 매주 도청 앞 광장은 차 없는 거리가 되고 시민들이 벌이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광주는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소중함, 시민들의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 지 일깨우고 있다. 자치구, 네트워크 단위로 추모행사가 이루어지고 주민들이 참여해 즐겁게 5,18 광주를 체험하고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43년 전 광주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를 되새겨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몸은 피곤하고 힘들었으나 마음만은 꽉 찬 하루였다. 요즘과 같은 시국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귓전에서 맴돌고 광주민중항쟁의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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