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글 나눔 |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페이지 정보
고양지회 작성일20-02-29 18:30 조회388회 댓글0건본문
저,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장은정(역사모)
22년을 살았던 일산을 떠나, 작년 12월에 종로구로 이사했습니다. 완전히 번갯불에 콩 볶아 먹었어요. 11월 중순에 계약하고, 12월에 이사를 했으니까요. 남편이 일산을 떠나서 서울로 입성하고 싶다는 의사를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한 번씩 비추기 시작한 건.... 생각해보면 꽤 되었습니다. 자신이 참석하는 모임이나 회의 등등이 다 시내나 강남에서 이루어지는데, 일산은 너무 멀고 외지다는 것이었습니다. 강남에서 저녁 모임이 있다면서 나갈 때는 어찌나 툴툴거리는지, 괜히 눈치가 보이곤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과 일산의 주거비 차이가 크기도 했고,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는, 갑자기 전학을 하면 적응하기 힘들 수 있다는 핑계로 안되겠다고 했죠. 고맙게도 아이들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저랑 의견이 같아서, 절대로 일산을 떠날 수 없다는 선언을 제 대신 해주기도 했습니다.
사실 맨 처음 일산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한 게,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철우(큰 아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남편은 당시에 살던 아파트에서 학교 가는 길이 찻길과 얽혀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아했습니다.
그러면서 교육여건이 좋다는 목동으로 갈까, 아니면 막 뜨고 있는 일산으로 갈까, 저울질하던 중이었어요. 볕이 좋던 어느 가을날, 철우, 선우랑 애들 사촌형을 데리고 일산에 집을 보러 온 날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날 아이들은 강촌공원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아파트 단지들 사이로 공원길이 나 있고, 차는 전혀 다니지 못하게 된 구조를 보고, 남편도 저도 무척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곧 계약을 하고, 그 겨울에 이사를 했었네요.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날이었습니다.
그렇게 옮겨온 일산에서...오래 살았습니다. 아이들 학창시절 다 보내고, 두 아이 다 군대 다녀올 때까지도 살았으니까요.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을 2번이나 보냈습니다. 저는 일산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아이들에게는 일산이 ‘고향’이었습니다. 큰 아이는 자기가 장가가면, ‘일산’에 집 얻어서 사는 거냐고 중학교 때 말하기도 했으니까요. 한참을 웃었더랬습니다.
아이들이 일산에서 학창시절을 다 보냈다면, 저는 일산에서 참교육학부모회 고양지회와 그 시절을 다 보낸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고양지회 일을 많이 했다는 뜻이 아닌 건 알고 계시죠. 그러나 고양지회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제가 일산에서 이렇게 오래 살 이유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뭐, 집집마다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혼란스럽고 불안할 때, 속 싶은 이야기를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릅니다. 때로 교육열이라는 광풍 속에 모두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을 때, 주위에 제정신인 사람들을 돌아보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남편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자기 분야에서 자리를 잡는 일에만 온통 정신이 팔린 자기애적 환자(!)처럼 생각될 때, 슬금슬금 올라오는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도 학부모회 사람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친구라기보다는 동지같았습니다. 적고보니 너무 비장해서, 좀 우습기도 하지만...저는 그랬습니다.
그랬던 일산을 떠나왔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던 곳인데, 이사는 쉽기만 하더군요. 어쨌든 계약하고, 이삿짐 센터를 부르고, 그렇게 하니 이사는 되어 있었습니다. 이사 온 집은 시내 한 복판이지만 생각보다 고즈넉하고 조용합니다. 다행히 하나로 마트도 5분 거리에 있고, 한살림 매장도 가까운 곳에 있네요. 남편은 시청 근처에서 조찬모임이 있는 날이면, “나, 조찬 모임에 걸어가는 사람이야”를 외치며 나갑니다. 저도 상담실에 걸어서 나가고, 걸어서 오고... 별일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왠지 안정이 안되는 기분이 있습니다. 주차장을 통해 골목으로 나서는데, “아, 여기는 내가 정든 곳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문득 문득 듭니다. 아이들이 어렸더라면 쓸쓸해서 이 동네 정말 못살았겠다, 싶습니다.
고양지회에도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이사도 많이들 가고, 귀농을 준비하는 분도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변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쓸쓸할 때도 있어요. 그래도 함께 한 세월이 보이지 않게 우리를 끈끈하게 이어준다는 믿음만은 놓지 않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좀 진정되면, 저희 집에서 커피 한 잔 하러들 오세요~
장은정(역사모)
22년을 살았던 일산을 떠나, 작년 12월에 종로구로 이사했습니다. 완전히 번갯불에 콩 볶아 먹었어요. 11월 중순에 계약하고, 12월에 이사를 했으니까요. 남편이 일산을 떠나서 서울로 입성하고 싶다는 의사를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한 번씩 비추기 시작한 건.... 생각해보면 꽤 되었습니다. 자신이 참석하는 모임이나 회의 등등이 다 시내나 강남에서 이루어지는데, 일산은 너무 멀고 외지다는 것이었습니다. 강남에서 저녁 모임이 있다면서 나갈 때는 어찌나 툴툴거리는지, 괜히 눈치가 보이곤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과 일산의 주거비 차이가 크기도 했고,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는, 갑자기 전학을 하면 적응하기 힘들 수 있다는 핑계로 안되겠다고 했죠. 고맙게도 아이들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저랑 의견이 같아서, 절대로 일산을 떠날 수 없다는 선언을 제 대신 해주기도 했습니다.
사실 맨 처음 일산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한 게,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철우(큰 아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남편은 당시에 살던 아파트에서 학교 가는 길이 찻길과 얽혀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아했습니다.
그러면서 교육여건이 좋다는 목동으로 갈까, 아니면 막 뜨고 있는 일산으로 갈까, 저울질하던 중이었어요. 볕이 좋던 어느 가을날, 철우, 선우랑 애들 사촌형을 데리고 일산에 집을 보러 온 날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날 아이들은 강촌공원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아파트 단지들 사이로 공원길이 나 있고, 차는 전혀 다니지 못하게 된 구조를 보고, 남편도 저도 무척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곧 계약을 하고, 그 겨울에 이사를 했었네요.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날이었습니다.
그렇게 옮겨온 일산에서...오래 살았습니다. 아이들 학창시절 다 보내고, 두 아이 다 군대 다녀올 때까지도 살았으니까요.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을 2번이나 보냈습니다. 저는 일산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아이들에게는 일산이 ‘고향’이었습니다. 큰 아이는 자기가 장가가면, ‘일산’에 집 얻어서 사는 거냐고 중학교 때 말하기도 했으니까요. 한참을 웃었더랬습니다.
아이들이 일산에서 학창시절을 다 보냈다면, 저는 일산에서 참교육학부모회 고양지회와 그 시절을 다 보낸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고양지회 일을 많이 했다는 뜻이 아닌 건 알고 계시죠. 그러나 고양지회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제가 일산에서 이렇게 오래 살 이유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뭐, 집집마다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혼란스럽고 불안할 때, 속 싶은 이야기를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릅니다. 때로 교육열이라는 광풍 속에 모두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을 때, 주위에 제정신인 사람들을 돌아보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남편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자기 분야에서 자리를 잡는 일에만 온통 정신이 팔린 자기애적 환자(!)처럼 생각될 때, 슬금슬금 올라오는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도 학부모회 사람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친구라기보다는 동지같았습니다. 적고보니 너무 비장해서, 좀 우습기도 하지만...저는 그랬습니다.
그랬던 일산을 떠나왔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던 곳인데, 이사는 쉽기만 하더군요. 어쨌든 계약하고, 이삿짐 센터를 부르고, 그렇게 하니 이사는 되어 있었습니다. 이사 온 집은 시내 한 복판이지만 생각보다 고즈넉하고 조용합니다. 다행히 하나로 마트도 5분 거리에 있고, 한살림 매장도 가까운 곳에 있네요. 남편은 시청 근처에서 조찬모임이 있는 날이면, “나, 조찬 모임에 걸어가는 사람이야”를 외치며 나갑니다. 저도 상담실에 걸어서 나가고, 걸어서 오고... 별일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왠지 안정이 안되는 기분이 있습니다. 주차장을 통해 골목으로 나서는데, “아, 여기는 내가 정든 곳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문득 문득 듭니다. 아이들이 어렸더라면 쓸쓸해서 이 동네 정말 못살았겠다, 싶습니다.
고양지회에도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이사도 많이들 가고, 귀농을 준비하는 분도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변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쓸쓸할 때도 있어요. 그래도 함께 한 세월이 보이지 않게 우리를 끈끈하게 이어준다는 믿음만은 놓지 않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좀 진정되면, 저희 집에서 커피 한 잔 하러들 오세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