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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글 나눔 | ‘라떼 쌤’과 ‘제멋대로 제자’들의 4박 5일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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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지회 작성일21-10-31 14:36 조회1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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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 딱 한판만하고 공부하자!’
 고3이었지만 고3도 고3 나름이다. 문이 잠긴 소피아홀(실내체육관)에 몰래 숨어 들어가 신나게 날았다. 어느 날부터 소피아홀 문은 잠겨 있었다. 그래서 우린 늘 하던 ‘농구 한판’도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날은 2층 비상구를 통해 들어가는 비밀 문을 해미가 알아왔다. 오래간만이었지만 호흡이 딱딱 맞았다. 몸에 붙지도 않는 공부를 하느라 온몸이 근질근질하고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던 터였다.
 쌤들한테 걸릴까봐 체육관에 불도 안 켜고 농구를 하던 그때,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한 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눈부신 빛 가운데 검은 그림자 한 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니들이 대학을 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우린 잠시 반성해야했다. 그리고 (2년전 용돈 모아 산 가죽) 농구공을 뺏아간 학주 손에 장을 지지기로 다짐했다. 우린 그 멤버들이다.

 오년 전, 그 ‘농구 한판!’ 친구들이 모여 앉았다. 그 중엔 가끔 만나던 친구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난 친구들이 더 많았다. 우린 학주에게 뺏긴 농구공도 못 찾았고 학주 손에 장을 지지게도 못 한 그냥 그렇고 그런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각자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고 직장에 다니며 성실하게 살고 있는 훌륭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이 모임엔 고등시절, 우릴 교실 밖의 세계로 – 가난에 절은 소설 속 짠내 나는 아낙네로, 풍전등화의 나라를 지키려 백두대간을 뛰어넘던 의병으로, 때론 정의를 부르짖는 광장의 청년으로, 때론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로- 끌고 다니셨던 국어 선생님도 함께 하셨다.
  이 국어쌤은 다른 쌤들과는 다르게 우리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으셨고 언제든 반겨주셨고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셨던 분이었다. 나의 고3 담임이셨고 1학년 때부터 독서토론반 지도 쌤이셨다. 내가 등록금이 없어 고민고민하다 연락을 드렸을 땐 (전교조 해직교사로 형편이 몹시 어려우셨을텐데) 단번에 대출보증을 서주셨던 분이다. 쌤은 내게 남자친구를 고르는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처음 남자친구를 사귀었을 때, 쌤에게 먼저 선을 보였다. 그 남친과 헤어졌으니 하는 말이지만, 쌤은 그 남친이 맘에 안 드셨던지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한마디로 쌤은 반짝반짝 빛나는 총각쌤들을 제끼고 울 학교 인기 1등이셨다.
  우리 여행은 이날 모임에서 약속됐다. 선생님은 전교조 조합원 교사들의 해외여행 가이드를 하셨다. 그 수익금으로 이주노동자를 위한 사업과 제3세계 어린이를 위한 학교 건립 사업을 지금까지 하고 계신다.
 이 날, 선생님의 여행얘기를 듣던 친구 해미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고 싶다고 했다. 선생님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갖는 여행의 의미를 설명하셨다. 그리고 해미에게 왜 가고 싶은지 물었다. 카톨릭 신자이기도 했던 해미는 10여년간 병상에 있던 남편이 몇 달 전 천국에 간 이야기를 했다.... 우린 해미와 산티아고 길을 함께 걷기로 했다.
 산티아고 순례 여행은 개인의 사정과 코로나로 몇 번 미뤄졌다. 그 사이 해미는 성당에서 이스라엘 순례여행을 다녀왔다. 해미의 감당키 어려웠던 아픔은 ‘세월이 약’을 먹으며 많이 아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행의 처음 목적은 바뀌었다, 선생님은 우리와의 여행 약속을 지키지 못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셨다. 그래서 우린 어디든 여행을 해서 선생님을 약속책임으로부터 해방 시켜드리기로 했다. 코로나 시국이었기에 우린 삼척을 중심으로 동해안을 따라 걷기로 하고 4박5일의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 전 지하철 계단에서 굴러 침을 맞던 성미도 감기몸살에 걸린 나도 목표달성을 위해 출발했다.
 역시나 여행은 좋은 것...ㅎㅎㅎ
이제 60대 후반이신 쌤이 운전대를 잡고 50대의 우리는 담박에 고등시절로 돌아가 웃고 까불고 그 때처럼 쌤을 놀렸다. 그때 그 시절 억울하게 혼이 났던 이야기도 풀어놓았다.
‘그랬어? 미안~’
시간이 지나 가벼워진 상처들은 이렇게 아물고.
‘그렇게 생각해 줘서 내가 고맙지!’
가난했던 어린 시절 먹고사느라 바쁜 부모를 대신해, 의지할 곳 없던 우리의 마음을 단단히 묶어두셨던 따스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넌 옛날에도 날 선생 취급을 안 해줬어~’
이젠 쌤과 우리가 같이 늙어가니 굳이 존댓말을 쓰지 않겠다는 성미에게 넌 여전히 선생을 맞먹으려 한다며 핀잔을 준다. 작은 차 안이 한 학급 아이들로 가득 찬 스쿨버스처럼 시끌벅적 난리다.
 여행 첫날엔 삼척에 비가 가로로 내렸다. 걷기로 했던 코스를 차를 타고 둘러봤다. 비바람 속에 바다색은 정말 아름다웠다. 지금 이 순간에 뭔들 아름답지 않을까?ㅋ
 쌤은 삼척에서 2년간 사셨다. 그래서 동네 맛집을 훤히 알고 계셨다. 쌤은 우릴 쌤의 단골집으로 데리고 다니셨다. 그 덕에 맛있는 것도 먹었지만 우린 때마다 쌤의 제자로 주인장들의 부러움을 사는 역할도 했다. 우린 쌤의 자부심인 것 같았다. ㅎㅎㅎ  쌤과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에 술을 마시니 혼자 끙끙 앓던 몸살도 나아버렸다. 해열진통제보다 더 좋은 약이 있더라.
 둘째 날엔 첫날에 못 걸었던 장호항부터 궁촌까지 바다를 따라 20키로미터를 걸었다. 장호항까지는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버스 맨 앞좌석에 앉았던 나는 시골 할머니들의 버스안내양 역할을 했다. 어떻게 혼자 이 짐을 들고 나오셨을까 싶은 보따리 보따리들을 버스에 들어 올려 실었다. 시골엔 저상버스와 안내양이 있으면 좋겠구나...
 초록 바다...세상에...너무나 아름다운 바다...실컷 보겠다고... 내 눈이 영상기록 장치라며 원 없이 담아보았다. 눈을 뜨고 있는 지금도 시원한 바다가 보인다.
 셋째 날엔 광진 봉수대와 광진항, 후진항, 새천년 도로, 삼척해변, 쏠비치 바다를 따라 걸었다. 추암 촛대바위도 구경했다. 이날은 일요일이라 관광객이 꽤 많았다. 가이드 모드가 발동한 쌤은 우릴 불러 세웠다. 누구라도 다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였다. 석회 바위가 물을 만나 녹아내린 둥글둥글한 바위에 대해 설명하셨다.
 ‘co***가 물을 만나면 co***&로 변해~! 그럼 바위가 저렇게 녹아내려!’
 항상 앞서 걷는 해미는 가버리고 없었고 쌤 말 안 듣기로 유명한 성미는 다른 길로 달아났다. 나만 꼼짝없이 붙들려 그 설명을 다 들어야 했다. 큰 목소리에 놀란 관광객은 나랑 쌤을 번갈아 쳐다봤고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오후엔 묵호항 등대를 거쳐 바람의 언덕엘 갔다. 논골담 까페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보며 맛난 커피를 마셨다. 묵호항에 들러 회를 떴다. 쌤은 여전히 가이드 모드셨고 물고기 이름을 줄줄이 알려주셨다. 바로 옆 식당에서 쫄깃쫄깃 찰진 회를 안주로 시원한 쏘주를 마셨다. 어느새 쌤은 ‘라떼 쌤’으로 불리셨고 전두환과 성심여고와 전교조에 대해 말씀하셨다.
 넷째 날엔  죽서루에 들렀는데 국화축제까지 하고 있어 다채로운 국화를 봤다. 이젠 건축양식까지 설명하시는 ‘다 알아 쌤’ 앞에 난  친구들이 도망가지 못 하게 잡아놓았다. 쌤은 예전부터 설명이 너~~무 길었다. 그 설명을 나만 들을 순 없었다.ㅋㅋㅋ
 예쁘게 자라고 있는 오죽을 봤다. 붉은 빛이 도는 검은 빛깔의 오죽은 색도 예쁘지만 단단하고 가는 것이 낭창낭창해 보였다. 궁채를 만들면 좋겠구나...장쌤이 떠올랐다. 한그루 뽑아다 드릴까...
 어제 걸었던 새천년도로와 삼척바다를 드라이브하며 복습을 당했다. ㅎㅎㅎ
 오후엔 무릉계곡을 따라 삼화사, 용추폭포까지 올라갔다. 아직 발목이 부실한 성미와 족저근막염으로 절뚝이는 나를 배려한 짧은 코스였다. 내려오는 길에 ‘5년의 약속’을 마무리한 쌤의 심정이 어떠신지 궁금했다. 쌤은 그냥 웃으셨다. 쌤은 임무 완수형에 가까웠고 감성형은 아니신 듯 했다.
 마지막 날엔 아침 일찍 여는 번개시장엘 갔다. 번개시장에는 그 날 잡아 올린 생선과 해산물이 수산물공판장 경매를 거친 후 남은 것이 온다. 삼척에 와서 끼니때마다 먹은 각종 수산물이 여기에 다 있었다. 차를 가져왔다면 사오고 싶었던 맛난 것들이 정말 많았다.
 쌤은 단골 건어물가게에서 사모님 심부름이라며 건어물 꾸러미를 장만하셨고 우린 그게 우리 것이란 걸 알았지만 모른척했다. 쌤의 그 마음을 알겠는데 왠지 쓰라린 것 같기도 했다. 우린 삼척고속버스 터미널에서 헤어졌다. 여느 때와는 달라 보이는 쌤을 안아드리고 싶었지만 그건 드라마에나 나올 장면, 어색해서 그만두고 또 뵙겠다는 약속을 드렸다.
 4박5일 동안 우린 80년대에 살았고 그 시절 우리를 지지해주시던 쌤의  따뜻함으로 지금껏 잘 살아오고 있다. 머리가 굵어졌다는 말의 뜻을 이젠 고루하게 느껴지는 쌤의 말씀을 들으며 알게 되었다. 넘을 수 없는 세대의 벽과 지금과는 다른 그 시절의 가치를 지키며 사시는 ‘라떼 쌤’이지만 한 시절 내겐 스승이었고 엄마빠였으며 멋진 남성이었던 쌤이 계서서 감사하다.


 쌤은 유럽에서 현지가이드 없이 혼자 34명을 인솔하셨단다. 그때 보다 우리 셋이 더 힘들다고 하셨다. 그런 제멋대로인 우리 셋은 이 여행이 끝나면 모르는 사람처럼 연락도 없이 잘 살다가 또 만날 것이다. 그때도 쌤이랑 같이 모여 앉아 투닥거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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