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글 나눔 | 독서후기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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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지회 작성일20-10-02 14:28 조회282회 댓글0건본문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서
송미강(역사모)
작년 11월 늘 그맘때면 찾아오는 계절성 우울에 젖어들 즈음. 피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자진해서 빠져들자 싶어 아주 우울하고 슬퍼질 수 있는 책을 찾아 나섰다.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과 신형철의 책표지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흐느끼고 있을 것 같은 한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꽉 다문 입술에 모였다가 턱 아래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작가가 시와 소설, 영화와 평론, 정신분석, 노랫가사 등에서 찾아낸 슬픔과 고통, 상실과 애도, 처절함에 대한 글들이 질서정연하고 정교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작가의 차분한 문체에 매료되어 그가 권하는 책들로 서가를 채우며 (결국 다 읽지는 못했지만...)작가가 공부한 슬픔을 공부하고 슬픔으로 빨려들어갔다.
책 곳곳에서 작가는 '빚을 지고 있는' 작가와 글들을 언급하며 겸손한 자리에서 좋은 글을 소개하고 읽어준다. 프로이트의 '덧없음' 대한 짧은 에세이와 박형준의 시,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가 가장 선명하게 남았다.
프로이트는 타고난 천재성과 성실성으로 촉망받는 의학도였음에도 유대인이라는 굴레 때문에 숱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생애 내내 인종차별과 주변인으로서의 굴욕, 전쟁의 참상과 죽음을 목도했음에도 삶의 덧없음에 쉽게 동의하지 않고, 어떤 시인이 토로한 삶에 대한 환멸의 본질을 통찰해내는 부분에서 묵직한 감동이 일었다. 작가가 썼듯이 "그렇다고 갑자기 낙천주의자로 변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의 환멸이 조금은 덧없어졌다."
작가는 좋은 시를 소개하고 그 시를 읽어준다. 행간의 의미와 맥락을 아주 섬세하고 생생하게 느끼도록 이끈다. 그래서 글을 읽다보면 작가가 쑥 밀어넣은 감정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 가슴이 먹먹해져 있곤 한다. 한 가난하고 미련하고 답답한 천진한 사내가 여자에게 매몰차게 차이는 장면을 묘사한 '생각날 때 마다 울었다' 를 읽으며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다. 어눌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이들이 살아가기엔 세상이 너무 팍팍하고 약삭빠른 것 같아서 누가 이 사내에게 눈치밥이라도 먹여줬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일었다.
이 책을 읽는 중에 유난히도 쓸쓸한 사람을 많이 만난 것 같다. 내가 쓸쓸하니 남들도 그렇게 보이는 투사(projection) 일 수도 있고, 이 책 덕분에 타인의 슬픔에 대한 민감성이 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서 전해지는 쓸쓸함과 슬픔을 비춰주고 함께 머물러주는 타인이 되어주는 경험은 어떤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쓸쓸함을 가치있게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작가는 타인에 민감성이 깊을수록 폭력이 들어설 자리가 줄어든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쓸쓸함과 슬픔, 그 아래에 저며있는 분노에 정확하고 깊이 다가갈수록, 그에게 ‘왜 그러냐’고 묻거나 ‘이제 그만하고 벗어나라’는 말 대신 고통의 무게를 같이 감당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런데, ‘덧없음’에 대한 프로이트의 단상이 그가 전쟁의 끔찍함과 대량학살을 경험하기 이전에 씌여진 글이지 않냐고 누군가 물었다. 그 때 정말 그런 것인가 반문하며 우울과 덧없음이 깊어졌다. 하지만 다시 그를 만난다면 만년의 프로이트가 구강암을 앓으며 제대로 된 마취도 없이 30여차례가 넘는 수술을 감당하며 저술활동에 매진한 삶의 태도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마음의 진실을 추구하고 허위를 거둬내고자 했던 그의 집념어린 삶은 결국 '인간에 대한 희망'이 아니었겠냐고..
작가는,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 이라고 정의한다. 슬픔을 공부하고 타인의 슬픔에 무심하지 않고자 하는 것은 결국 희망을 버리지 말고 슬픔의 유대를 만들어 함께 버텨가자는 조용한 선언으로 들렸다.
송미강(역사모)
작년 11월 늘 그맘때면 찾아오는 계절성 우울에 젖어들 즈음. 피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자진해서 빠져들자 싶어 아주 우울하고 슬퍼질 수 있는 책을 찾아 나섰다.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과 신형철의 책표지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흐느끼고 있을 것 같은 한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꽉 다문 입술에 모였다가 턱 아래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작가가 시와 소설, 영화와 평론, 정신분석, 노랫가사 등에서 찾아낸 슬픔과 고통, 상실과 애도, 처절함에 대한 글들이 질서정연하고 정교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작가의 차분한 문체에 매료되어 그가 권하는 책들로 서가를 채우며 (결국 다 읽지는 못했지만...)작가가 공부한 슬픔을 공부하고 슬픔으로 빨려들어갔다.
책 곳곳에서 작가는 '빚을 지고 있는' 작가와 글들을 언급하며 겸손한 자리에서 좋은 글을 소개하고 읽어준다. 프로이트의 '덧없음' 대한 짧은 에세이와 박형준의 시,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가 가장 선명하게 남았다.
프로이트는 타고난 천재성과 성실성으로 촉망받는 의학도였음에도 유대인이라는 굴레 때문에 숱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생애 내내 인종차별과 주변인으로서의 굴욕, 전쟁의 참상과 죽음을 목도했음에도 삶의 덧없음에 쉽게 동의하지 않고, 어떤 시인이 토로한 삶에 대한 환멸의 본질을 통찰해내는 부분에서 묵직한 감동이 일었다. 작가가 썼듯이 "그렇다고 갑자기 낙천주의자로 변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의 환멸이 조금은 덧없어졌다."
작가는 좋은 시를 소개하고 그 시를 읽어준다. 행간의 의미와 맥락을 아주 섬세하고 생생하게 느끼도록 이끈다. 그래서 글을 읽다보면 작가가 쑥 밀어넣은 감정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 가슴이 먹먹해져 있곤 한다. 한 가난하고 미련하고 답답한 천진한 사내가 여자에게 매몰차게 차이는 장면을 묘사한 '생각날 때 마다 울었다' 를 읽으며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다. 어눌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이들이 살아가기엔 세상이 너무 팍팍하고 약삭빠른 것 같아서 누가 이 사내에게 눈치밥이라도 먹여줬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일었다.
이 책을 읽는 중에 유난히도 쓸쓸한 사람을 많이 만난 것 같다. 내가 쓸쓸하니 남들도 그렇게 보이는 투사(projection) 일 수도 있고, 이 책 덕분에 타인의 슬픔에 대한 민감성이 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서 전해지는 쓸쓸함과 슬픔을 비춰주고 함께 머물러주는 타인이 되어주는 경험은 어떤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쓸쓸함을 가치있게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작가는 타인에 민감성이 깊을수록 폭력이 들어설 자리가 줄어든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쓸쓸함과 슬픔, 그 아래에 저며있는 분노에 정확하고 깊이 다가갈수록, 그에게 ‘왜 그러냐’고 묻거나 ‘이제 그만하고 벗어나라’는 말 대신 고통의 무게를 같이 감당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런데, ‘덧없음’에 대한 프로이트의 단상이 그가 전쟁의 끔찍함과 대량학살을 경험하기 이전에 씌여진 글이지 않냐고 누군가 물었다. 그 때 정말 그런 것인가 반문하며 우울과 덧없음이 깊어졌다. 하지만 다시 그를 만난다면 만년의 프로이트가 구강암을 앓으며 제대로 된 마취도 없이 30여차례가 넘는 수술을 감당하며 저술활동에 매진한 삶의 태도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마음의 진실을 추구하고 허위를 거둬내고자 했던 그의 집념어린 삶은 결국 '인간에 대한 희망'이 아니었겠냐고..
작가는,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 이라고 정의한다. 슬픔을 공부하고 타인의 슬픔에 무심하지 않고자 하는 것은 결국 희망을 버리지 말고 슬픔의 유대를 만들어 함께 버텨가자는 조용한 선언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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