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글 나눔 | 제주에서 한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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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지회 작성일20-05-13 19:52 조회582회 댓글0건본문
2020, 1월 제주 한 달 살아보기
전은경(역사모)
실제론 반달 정도 살아본 거다.
1년 전 1월에 제주 북동쪽 북촌리 마을에서 한 달 살아보고는 너무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에 실망했다. 다녀온 후 이번엔 차라리 날씨 좋다던 이웃이 알려준 치앙마이를 가볼까 하다가 긴 비행도 싫고, 낯선 곳도 내키지 않아 수소문한 끝에 이번에는 제주에서 가장 따뜻하고 바람이 적다는 남원읍에 정착했다. 지난해엔 지인의 세컨하우스를 무료로 이용하고, 이번엔 우리가 비용을 지불하고 장소를 직접 골라 예약하고 이용했으니 과정이 편하긴 했다. 1월, 2학기가 한창 무르익고 장서점검에 대한 부담감이 불편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다가오는 미래에 따먹을 솜사탕을 마음속에 매달아 둔다는 심정으로 숙소랑 비행기를 일사천리로 예약했다.
기다리던 방학식 날 오전에 조퇴를 달고 도망치듯 일상을 벗어나 훌훌 공항 가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다녀온 지 두 달이나 지난 이미 다 잊어버린 제주살이로 글을 쓰려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해 온 뒤 처음으로 메모장을 뒤적인다. 기록된 일정이 희미한 기억을 부추긴다. 제주공항에 내려서 버스를 1시간 20분여를 타고 남원체육공원에 내리니 우리가 예약한 숙소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건물은 오래된 펜션을 리모델링한 모습이었지만, 넓은 마당에 키 큰 야자수와 귤나무가 우리의 일상 탈출을 축복하듯이 늠름하게 우리를 반겨주었다. 하얀 외벽 페인트에 지중해 나라에서 유행하는 코발트블루의 간판은 모처럼 우리를 설레게 했다. 남편과 나는 있는 내내 그 숙소가 마음에 꼭 들었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서귀포 올레 시장, 이중섭미술관 – 올레 4코스 – 남원성당 , 의귀리 마을 – 한림수목원 – 기당미술관, 표선오일장 – 물영아리오름 습지 – 올레4코스 – 올레4코스 – 공천포 위미리 마을 – 표선성당 – 우도 – 사려니숲길 이름을 보니 새삼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나는 젊을 때부터 제주를 수도 없이 다녀갔다. 친구랑, 가족이랑, 시부모님이랑, 문일만이랑, 규이만이랑만, 여고동창생이랑, 남편이랑만…
누구랑 왔느냐에 따라 방문하는 곳, 먹는 곳, 묵는 곳이 각기 다르다. 수많은 방문에도 늘 새로움을 가능케 하는 곳이 제주이다. 호기심 많은 내게 제주는 무궁무진한 보물섬인 것이다.
남편이랑만 방문은 두 번째인 셈이다. 남편이랑 하는 여행은 조건이 많다. 자동차 타고 다니는 거 싫어, 맛없는 밥 사 먹는 거 싫어, 너무 욕심부리며 소문 난 곳 가는 거 딱 질색이야, 사람 많은 곳 싫어, 욕심내서 많이 걷는 거 싫어, 아침 일찍 부지런히 움직이는 거 싫어, 어두운 저녁에 돌아다니는 거 싫어…… 등등.
같이 다니려면 말 많은 이 입을 닫아줘야 조용하니, 이번 여행은 그가 싫지 않은 선에서 대충 다닌 셈이다.
♨버스
그래서 우린 렌터카를 빌리지 않고 처음으로 시내버스로만 다녔다. 난 제주에서 차 없이 다닌 적이 처음이었는데 이게 참 재미있었다. 자동차로 다니는 것과는 완전 다른 세상이다. 느리지만 현지인이 사는 것처럼 살아본 것인데, 제주를 완전 더 깊이 알게 된 경험이었다. 이를테면 한번은 의귀리 4.3 길 걸으려 버스를 탔을 때 일이다. 나이 지긋한 버스운전사가 우회전을 깜빡하고 계속 직진을 했는데 순간 나이든 할머니들이 큰소리로 그 사실을 알리고, 차를 “빠꾸, 빠꾸” 하면서 운행을 지도하는 거다. 그 차에는 남녀 노인분들이 여럿이었는데 단연코 할머니들이 주저하지 않고 상황을 바로 잡는 게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아~ 이래서 제주 여자가 유명하구나~’ 하고 확인했다. 또 한 가지는 제주 버스기사들은 고지식할 정도로 운행규정을 잘 지킨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떤 버스를 타나 반드시 노인분들이 천천히 타고 자리를 잡아 앉을 때까지는 절대 재촉하지 않는다. 안전벨트 매라는 이야기도 한결같다. 나처럼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대충 사는 사람에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제주는 시내버스를 통해 마을 간 물건을 쉽게 주고받았다. 앞자리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니 맡길 짐을 가지고 버스 지나는 길에 기다리고 섰다가 버스 앞을 사진 찍어 물건 받을 이에게 전송하고 짐을 기사 옆에 올리고 3000원을 준다. 그럼 기사분이 지나는 길목에 짐 받을 사람이 나와 섰다가 짐을 바로 받아 가는 것이다. 내가 만약 물건 받을 사람이 버스를 놓치면 어떻게 되냐고 물으니, 그러면 버스 종점 가서 찾는 거라고 한다. 다들 오래전부터 이용해서 일반화되어있는 상식인가 보다.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 성당
여행하면서 주일미사를 처음으로 빼지 않고 참석했다. 첫 주일은 숙소가 있는 남원성당을 혼자 걸어서 갔다. 생각보다 멀고 바람이 심한 날이었으나 호젓한 시골 성당은 내 나이 또래의 4명의 중년 성가대원들의 진실된 찬송만으로도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주임신부님의 남원 귤농가의 농협 수매 관련 우려의 소식은 마치 내 가족의 일처럼 마음이 아렸다. 내가 참 좋았다는 말에 솔깃한 탓인지 남편이 다음 주일엔 표선성당을 가보자고 먼저 말을 꺼낸다. 난 참 별일도 많구나 하면서 이게 무슨 횡재냐 하고 생각했다. 표선성당은 제주의 이쁜 성당으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새로 널찍이 지었는데 수녀님도 여러분이고 꼭 영화에 나올 법한 분위기의 성당이었다. 그런데 오묘하게도 우린 버스를 한 대 놓치고 다음 버스를 타느라 5분 늦게 도착했다. 여느 때 같으면 성당도, 지각도 몹시 싫어하는 남편인데 부랴부랴 성당에 들어서고 나니 자리가 신부님 맨 앞자리 2개만 달랑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난 순간 돌아나가야 할 판이군 하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어찌어찌 가서 앉는다. 우린 끝까지 그 지루하다던 미사를 맨 앞자리에 앉아 얌전히 마쳤다. 게다가 이 성당은 미사 도중 실제 무릎도 여러 번 꿇어 나를 염려스럽게 만들었지만 우린 끝까지 순한 양이 되어 있었던 셈이다.
흠, 이럴 때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할렐루야 ~!!아~멘~!!
♨ 한림수목원의 재발견
한림수목원은 아주 오랜만에 다시 들렸다. 남원에서 버스로는 제주시 가는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리는 남동에서 북서 방향으로 지루한 코스였다. 하지만 결코 소요시간이 아깝지 않은 방문이었다. 협재해수욕장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어마어마했지만 수목원 안으로 들어서니 인디언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오픈형 장작 난로가 여기저기 놓여있어 설레는 여행자를 맞는다. 재발견은 여러 정원 중 분재원과 새로 꾸민 수선화 정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난 원래 충분히 자랄 수 있는 나무를 인공적으로 사람의 취향에 맞게 이리저리 비틀어 크지도 못하게 철사로 매어 놓은 분재 따위는 보기도 싫어 피해 다닐 정도다. 그런데 워낙 힘들게 온 곳이라 본전 생각에 하나도 빼지 않으려 둘러보다가 분재원을 보게 되었는데, 이게 또 예술이다. 모과나무, 단풍나무 등 보통은 300년에서 500여년 된 분재 나무들은 하나의 형용키 어려운 예술 작품을 대하는 듯했다. 오래된 고목이 주는 신비함이 더해져 바라보는 내 마음이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사물로 만든 예술 작품이 아닌 생명이 깃든 예술품이라고나 할까? 그와는 정반대로 대비되는 밝고 향기로운 정원은 새로 꾸몄다는 수선화 정원이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하얀 꽃대가 막 피기 시작하는 때여서 한 달 정도 있다면 매화의 개화 시기와 맞물려 아주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순백의 에덴동산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한겨울에 수선화 향을 듬뿍 맡으니 잠시나마 인생이 너무 달콤하고 ‘스윗’하게 여겨지는 환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 기당미술관
비가 예보되어 트레킹은 포기하고 남편이 열심히 검색해 들린 곳이다. 서귀포 시립 미술관인데 개인이 지어 기증한 곳으로 규모와 관리가 제법이다. 작품은 주로 제주 출신 화가들의 작품이었고 주제도 거의 제주를 그린 것이었다. 그날 관람객은 젊은 아기를 데리고 온 한 가족을 빼고 우리가 전부였다. 젊은 부부는 아이들 놀이방에 주로 머물렀으니 넓은 미술관을 거의 우리 둘이 천천히 둘러보고 쉬다 온 셈이다. 여행 중간에 문화에 대한 욕구가 딱 필요할 시기에 들른 탓이었는지, 이 작고 조용하고 촉촉한 미술관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매일 15000보를 목표로 하던 나름 분주한 생활이 쉬어가던 날.
♨ 우도-too much talker
이번 제주여행에서는 육지에서 알던 지인을 두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같이 일하는 중학교 아는 선생님이 고향에 내려왔다고 직접 운전해 숙소를 찾아와 만나고, 다른 한 번은 우연히 남편 후배가 우도에 내려와 있다고 해서 우도로 초대받아 가서 만났다. 우도에서 만난 후배는 일찍이 그 부인이 우도에 내려와 살면서 사진을 찍고 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터라 내심 궁금했는데, 마침 만날 기회가 성사된 것이다. 나는 결혼하고 애들 키우고, 너무 평범한 구시대의 유물 같은 삶을 살아 온 터라, 혼자 우도에 내려와 사진 찍는다는 그 와이프는 어떤 생각과 모습과 삶을 지니고 있을까 엄청 궁금했다. 친절하게도 바닷바람에 한 귀퉁이가 삭아 속살을 내비친 자가용을 끌고 직접 마중 나온 후배의 안내를 들으며 1차 우도를 드라이브한 우리는 언덕 위의 작은 아파트로 안내되어, 직접 물질해 잡아온 소라로 만든 해물볶음이 메인인 따뜻한 한 끼 식사를 대접받았다. 햇살 좋은 집에 따뜻한 식사와 사람 좋은 두 후배 내외는 숨쉬기 어려울 만큼의 우도의 바람을 잊어버릴 정도로 따뜻이 우리를 대해 주었고, 우리에게 2차로 우도의 모든 것을 몇 시간 내에 보여주고 들려주고 안내해줬다. 온 집을 자신이 찍은 5년여간의 우도 사진으로 꾸민 그녀는 의외로 사랑스럽고, 아기 같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이나 일(우도를 기록하고 보존하고 싶다는)에 있어서는 너무나 열정적인 모습이 내가 직접 만나기 전에 상상하던 모습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남편과 아이들에 밀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는 내게는 신세대의 쿨한 오피스걸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삶이 무척이나 경이로워 보였다. 아울러 우도에 사는 그녀는 too much talker이기도 했다.
♨ 맛있었던 것
이번 제주에서 가장 맛있었던 집은 4코스 올레길에 들린 ‘세화 해녀의 집’에서 먹어본 물회였다. 전복, 소라 물회였는데 너무 신선하고 맛이 좋았다. 옆에는 멀리 영주(내 고향 근처)에서 왔다는 스님 일행(8분) 이 드시던 그 많은 갈치조림과 모듬회도 좋아 보였지만 난 스님들이 갈치조림을 그렇게 맛나게 드시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다음으로는 남원읍에서 파는 중앙닭집 치킨이다. 음, 가게건물을 딱 보니 맛집 같아서 검색할 틈도 없이 갑자기 버스에서 내려 사서 들고 집에 들어가 저녁 대신으로 먹었는데, 감자와 닭똥집을 닭과 같이 튀겨주는데 정말 특별했다. 양이 너무 많아 주인집과 나눠 먹었다. 그래도 제일 맛있게 많이 먹은 건 귤이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2층 올라가는 계단 옆 늘 갓 딴 귤을 한 박스 마련해두었는데 얼마나 달고 맛있던지 난 거의 매일 10개 넘게 먹었다. 왜 제주도 사람들이 귤은 (천혜향이니, 황금향이니, 한라봉이 아니고) 뭐니 뭐니해도 그냥 귤이 제일 맛있어 한 그 말에 진짜 공감했다.
일일이 다 쓸 수는 없지만 그 밖에도 우리가 매일 15,000보를 찍으며 환호했던 올레 4,5코스, 물영아리오름, 사려니숲길, 공천포, 위미리, 의귀리 귤밭, 모두 다 너무 좋았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제주에 있었던 그 시간 내내 늘 행복했었던 것 같다.
전은경(역사모)
실제론 반달 정도 살아본 거다.
1년 전 1월에 제주 북동쪽 북촌리 마을에서 한 달 살아보고는 너무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에 실망했다. 다녀온 후 이번엔 차라리 날씨 좋다던 이웃이 알려준 치앙마이를 가볼까 하다가 긴 비행도 싫고, 낯선 곳도 내키지 않아 수소문한 끝에 이번에는 제주에서 가장 따뜻하고 바람이 적다는 남원읍에 정착했다. 지난해엔 지인의 세컨하우스를 무료로 이용하고, 이번엔 우리가 비용을 지불하고 장소를 직접 골라 예약하고 이용했으니 과정이 편하긴 했다. 1월, 2학기가 한창 무르익고 장서점검에 대한 부담감이 불편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다가오는 미래에 따먹을 솜사탕을 마음속에 매달아 둔다는 심정으로 숙소랑 비행기를 일사천리로 예약했다.
기다리던 방학식 날 오전에 조퇴를 달고 도망치듯 일상을 벗어나 훌훌 공항 가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다녀온 지 두 달이나 지난 이미 다 잊어버린 제주살이로 글을 쓰려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해 온 뒤 처음으로 메모장을 뒤적인다. 기록된 일정이 희미한 기억을 부추긴다. 제주공항에 내려서 버스를 1시간 20분여를 타고 남원체육공원에 내리니 우리가 예약한 숙소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건물은 오래된 펜션을 리모델링한 모습이었지만, 넓은 마당에 키 큰 야자수와 귤나무가 우리의 일상 탈출을 축복하듯이 늠름하게 우리를 반겨주었다. 하얀 외벽 페인트에 지중해 나라에서 유행하는 코발트블루의 간판은 모처럼 우리를 설레게 했다. 남편과 나는 있는 내내 그 숙소가 마음에 꼭 들었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서귀포 올레 시장, 이중섭미술관 – 올레 4코스 – 남원성당 , 의귀리 마을 – 한림수목원 – 기당미술관, 표선오일장 – 물영아리오름 습지 – 올레4코스 – 올레4코스 – 공천포 위미리 마을 – 표선성당 – 우도 – 사려니숲길 이름을 보니 새삼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나는 젊을 때부터 제주를 수도 없이 다녀갔다. 친구랑, 가족이랑, 시부모님이랑, 문일만이랑, 규이만이랑만, 여고동창생이랑, 남편이랑만…
누구랑 왔느냐에 따라 방문하는 곳, 먹는 곳, 묵는 곳이 각기 다르다. 수많은 방문에도 늘 새로움을 가능케 하는 곳이 제주이다. 호기심 많은 내게 제주는 무궁무진한 보물섬인 것이다.
남편이랑만 방문은 두 번째인 셈이다. 남편이랑 하는 여행은 조건이 많다. 자동차 타고 다니는 거 싫어, 맛없는 밥 사 먹는 거 싫어, 너무 욕심부리며 소문 난 곳 가는 거 딱 질색이야, 사람 많은 곳 싫어, 욕심내서 많이 걷는 거 싫어, 아침 일찍 부지런히 움직이는 거 싫어, 어두운 저녁에 돌아다니는 거 싫어…… 등등.
같이 다니려면 말 많은 이 입을 닫아줘야 조용하니, 이번 여행은 그가 싫지 않은 선에서 대충 다닌 셈이다.
♨버스
그래서 우린 렌터카를 빌리지 않고 처음으로 시내버스로만 다녔다. 난 제주에서 차 없이 다닌 적이 처음이었는데 이게 참 재미있었다. 자동차로 다니는 것과는 완전 다른 세상이다. 느리지만 현지인이 사는 것처럼 살아본 것인데, 제주를 완전 더 깊이 알게 된 경험이었다. 이를테면 한번은 의귀리 4.3 길 걸으려 버스를 탔을 때 일이다. 나이 지긋한 버스운전사가 우회전을 깜빡하고 계속 직진을 했는데 순간 나이든 할머니들이 큰소리로 그 사실을 알리고, 차를 “빠꾸, 빠꾸” 하면서 운행을 지도하는 거다. 그 차에는 남녀 노인분들이 여럿이었는데 단연코 할머니들이 주저하지 않고 상황을 바로 잡는 게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아~ 이래서 제주 여자가 유명하구나~’ 하고 확인했다. 또 한 가지는 제주 버스기사들은 고지식할 정도로 운행규정을 잘 지킨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떤 버스를 타나 반드시 노인분들이 천천히 타고 자리를 잡아 앉을 때까지는 절대 재촉하지 않는다. 안전벨트 매라는 이야기도 한결같다. 나처럼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대충 사는 사람에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제주는 시내버스를 통해 마을 간 물건을 쉽게 주고받았다. 앞자리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니 맡길 짐을 가지고 버스 지나는 길에 기다리고 섰다가 버스 앞을 사진 찍어 물건 받을 이에게 전송하고 짐을 기사 옆에 올리고 3000원을 준다. 그럼 기사분이 지나는 길목에 짐 받을 사람이 나와 섰다가 짐을 바로 받아 가는 것이다. 내가 만약 물건 받을 사람이 버스를 놓치면 어떻게 되냐고 물으니, 그러면 버스 종점 가서 찾는 거라고 한다. 다들 오래전부터 이용해서 일반화되어있는 상식인가 보다.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 성당
여행하면서 주일미사를 처음으로 빼지 않고 참석했다. 첫 주일은 숙소가 있는 남원성당을 혼자 걸어서 갔다. 생각보다 멀고 바람이 심한 날이었으나 호젓한 시골 성당은 내 나이 또래의 4명의 중년 성가대원들의 진실된 찬송만으로도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주임신부님의 남원 귤농가의 농협 수매 관련 우려의 소식은 마치 내 가족의 일처럼 마음이 아렸다. 내가 참 좋았다는 말에 솔깃한 탓인지 남편이 다음 주일엔 표선성당을 가보자고 먼저 말을 꺼낸다. 난 참 별일도 많구나 하면서 이게 무슨 횡재냐 하고 생각했다. 표선성당은 제주의 이쁜 성당으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새로 널찍이 지었는데 수녀님도 여러분이고 꼭 영화에 나올 법한 분위기의 성당이었다. 그런데 오묘하게도 우린 버스를 한 대 놓치고 다음 버스를 타느라 5분 늦게 도착했다. 여느 때 같으면 성당도, 지각도 몹시 싫어하는 남편인데 부랴부랴 성당에 들어서고 나니 자리가 신부님 맨 앞자리 2개만 달랑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난 순간 돌아나가야 할 판이군 하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어찌어찌 가서 앉는다. 우린 끝까지 그 지루하다던 미사를 맨 앞자리에 앉아 얌전히 마쳤다. 게다가 이 성당은 미사 도중 실제 무릎도 여러 번 꿇어 나를 염려스럽게 만들었지만 우린 끝까지 순한 양이 되어 있었던 셈이다.
흠, 이럴 때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할렐루야 ~!!아~멘~!!
♨ 한림수목원의 재발견
한림수목원은 아주 오랜만에 다시 들렸다. 남원에서 버스로는 제주시 가는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리는 남동에서 북서 방향으로 지루한 코스였다. 하지만 결코 소요시간이 아깝지 않은 방문이었다. 협재해수욕장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어마어마했지만 수목원 안으로 들어서니 인디언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오픈형 장작 난로가 여기저기 놓여있어 설레는 여행자를 맞는다. 재발견은 여러 정원 중 분재원과 새로 꾸민 수선화 정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난 원래 충분히 자랄 수 있는 나무를 인공적으로 사람의 취향에 맞게 이리저리 비틀어 크지도 못하게 철사로 매어 놓은 분재 따위는 보기도 싫어 피해 다닐 정도다. 그런데 워낙 힘들게 온 곳이라 본전 생각에 하나도 빼지 않으려 둘러보다가 분재원을 보게 되었는데, 이게 또 예술이다. 모과나무, 단풍나무 등 보통은 300년에서 500여년 된 분재 나무들은 하나의 형용키 어려운 예술 작품을 대하는 듯했다. 오래된 고목이 주는 신비함이 더해져 바라보는 내 마음이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사물로 만든 예술 작품이 아닌 생명이 깃든 예술품이라고나 할까? 그와는 정반대로 대비되는 밝고 향기로운 정원은 새로 꾸몄다는 수선화 정원이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하얀 꽃대가 막 피기 시작하는 때여서 한 달 정도 있다면 매화의 개화 시기와 맞물려 아주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순백의 에덴동산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한겨울에 수선화 향을 듬뿍 맡으니 잠시나마 인생이 너무 달콤하고 ‘스윗’하게 여겨지는 환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 기당미술관
비가 예보되어 트레킹은 포기하고 남편이 열심히 검색해 들린 곳이다. 서귀포 시립 미술관인데 개인이 지어 기증한 곳으로 규모와 관리가 제법이다. 작품은 주로 제주 출신 화가들의 작품이었고 주제도 거의 제주를 그린 것이었다. 그날 관람객은 젊은 아기를 데리고 온 한 가족을 빼고 우리가 전부였다. 젊은 부부는 아이들 놀이방에 주로 머물렀으니 넓은 미술관을 거의 우리 둘이 천천히 둘러보고 쉬다 온 셈이다. 여행 중간에 문화에 대한 욕구가 딱 필요할 시기에 들른 탓이었는지, 이 작고 조용하고 촉촉한 미술관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매일 15000보를 목표로 하던 나름 분주한 생활이 쉬어가던 날.
♨ 우도-too much talker
이번 제주여행에서는 육지에서 알던 지인을 두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같이 일하는 중학교 아는 선생님이 고향에 내려왔다고 직접 운전해 숙소를 찾아와 만나고, 다른 한 번은 우연히 남편 후배가 우도에 내려와 있다고 해서 우도로 초대받아 가서 만났다. 우도에서 만난 후배는 일찍이 그 부인이 우도에 내려와 살면서 사진을 찍고 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터라 내심 궁금했는데, 마침 만날 기회가 성사된 것이다. 나는 결혼하고 애들 키우고, 너무 평범한 구시대의 유물 같은 삶을 살아 온 터라, 혼자 우도에 내려와 사진 찍는다는 그 와이프는 어떤 생각과 모습과 삶을 지니고 있을까 엄청 궁금했다. 친절하게도 바닷바람에 한 귀퉁이가 삭아 속살을 내비친 자가용을 끌고 직접 마중 나온 후배의 안내를 들으며 1차 우도를 드라이브한 우리는 언덕 위의 작은 아파트로 안내되어, 직접 물질해 잡아온 소라로 만든 해물볶음이 메인인 따뜻한 한 끼 식사를 대접받았다. 햇살 좋은 집에 따뜻한 식사와 사람 좋은 두 후배 내외는 숨쉬기 어려울 만큼의 우도의 바람을 잊어버릴 정도로 따뜻이 우리를 대해 주었고, 우리에게 2차로 우도의 모든 것을 몇 시간 내에 보여주고 들려주고 안내해줬다. 온 집을 자신이 찍은 5년여간의 우도 사진으로 꾸민 그녀는 의외로 사랑스럽고, 아기 같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이나 일(우도를 기록하고 보존하고 싶다는)에 있어서는 너무나 열정적인 모습이 내가 직접 만나기 전에 상상하던 모습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남편과 아이들에 밀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는 내게는 신세대의 쿨한 오피스걸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삶이 무척이나 경이로워 보였다. 아울러 우도에 사는 그녀는 too much talker이기도 했다.
♨ 맛있었던 것
이번 제주에서 가장 맛있었던 집은 4코스 올레길에 들린 ‘세화 해녀의 집’에서 먹어본 물회였다. 전복, 소라 물회였는데 너무 신선하고 맛이 좋았다. 옆에는 멀리 영주(내 고향 근처)에서 왔다는 스님 일행(8분) 이 드시던 그 많은 갈치조림과 모듬회도 좋아 보였지만 난 스님들이 갈치조림을 그렇게 맛나게 드시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다음으로는 남원읍에서 파는 중앙닭집 치킨이다. 음, 가게건물을 딱 보니 맛집 같아서 검색할 틈도 없이 갑자기 버스에서 내려 사서 들고 집에 들어가 저녁 대신으로 먹었는데, 감자와 닭똥집을 닭과 같이 튀겨주는데 정말 특별했다. 양이 너무 많아 주인집과 나눠 먹었다. 그래도 제일 맛있게 많이 먹은 건 귤이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2층 올라가는 계단 옆 늘 갓 딴 귤을 한 박스 마련해두었는데 얼마나 달고 맛있던지 난 거의 매일 10개 넘게 먹었다. 왜 제주도 사람들이 귤은 (천혜향이니, 황금향이니, 한라봉이 아니고) 뭐니 뭐니해도 그냥 귤이 제일 맛있어 한 그 말에 진짜 공감했다.
일일이 다 쓸 수는 없지만 그 밖에도 우리가 매일 15,000보를 찍으며 환호했던 올레 4,5코스, 물영아리오름, 사려니숲길, 공천포, 위미리, 의귀리 귤밭, 모두 다 너무 좋았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제주에 있었던 그 시간 내내 늘 행복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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