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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모(역사모임) | 뉴질랜드 밀포드 트래킹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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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지회 작성일19-06-03 10:41 조회5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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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밀포드(Milford) 트래킹을 다녀와서

송미강(역사모)

 50줄을 넘기면서부터 둘 셋이 모이기만 하면 건강얘기는 안빠지고 등장한다. 어디가 안 좋고 먹어야 할 약이며 건강음식은 뭐고 등등의 얘기를 다 훑고 나면 운동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무릎이며 허리에 무리를 가하면 안되는 처지인데다 수영은 이제 귀찮다. 결국 걷는 게 최고라는 결론이 나고 여기저기 걷기 좋은 곳을 얘기하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역사모 식구들과 수다를 떨다 지난 2월 멋지고 행복하게 걸었던 뉴질랜드 밀포드 트래킹 여행을 자랑하게 되었는데, 덜컥 소식지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밀포드는 세계 3대 트래킹 중 하나라고 한다. 여행이 취미인 친구가 최고의 트래킹이라는 찬사를 어지간히도 했었던지 남편은 몇 년 전부터 가보지도 않은 밀포드에 반해있었다. 그러나 아직 못 가본 곳도 많고 휴가철이 아닌 겨울에 가야 한다는 제약도 있어 순위에서 자꾸 밀렸다. 작년 여름 아직 무릎이 성할 때 가보자 싶어 뉴질랜드 현지여행사에 컨택해 봤는데 성수기인 2월은 거의 예약이 끝난 상태였고, 2명 빈 날이 하루 있다고 해 서둘러 예약을 했다. 밀포드는 출입인원을 사전예약제에 의해 철저하게 제한하고 있는데, 여행사는 정부에서 운영권을 위탁받은 얼티밋하이크(Ulitimate Hike)라는 회사를 통해 밀포드로 들어가는 방법을 안내해 주었다. 한 팀은 50명으로 제한되어 있고 4박 5일간 모든 코스를 함께 여행한다.
  첫 날은 오클랜드를 거쳐 뉴질랜드 남섬 퀸즈타운에 도착한 후 다운타운에 있는 얼티밋하이크 사무실로 사전 브리핑을 받으러 갔다.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노인들이 더러 있어서 혹여나 했던 체력 걱정은 좀 덜 수 있었다. 이 분들을 고준험산으로 데리고 다니진 않을테니. 트래킹을 함께 할 외국인들 틈에서 인사를 나누며 영어 스트레스가 스멀스멀 올라올 즈음 다행히 한국인 가이드가 나타나 친절하게 안내 해 주었다. 여행 사전정보를 꼼꼼히 체크못한 바람에 모기약, 슬리퍼, 초겨울용 점퍼 등을 추가로 구입해야 했는데 뉴질랜드 물가가 상당히 쎄서 속이 많이 쓰렸다. 가이드는 샌드플라이라는 모기가 많아 장갑이 필수라고 하며 여기저기 벌겋게 부어오른 자국을 보여준다. 덜컥 겁이 나 목장갑 한 켤레도 만오천원에 샀다. 대신 회사에서 제공하는 배낭과 우비, 침대시트 등은 품질이 좋아서 만족스럽게 사용할 수 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회사 앞에 모여 대형 버스로 3시간여를 달려 밀포드로 들어가는 배에 올랐다. 50여명의 여행객을 태운 배는 다시 1시간 반을 달려 밀포드 트레일 입구에 도착했다. 선착장을 지나 땅을 내딛자마자 달려드는 샌드플라이들! 도시를 떠나 배를 타고 오지에 들어와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비싸게 주고 산 목장갑의 한계효용이 극대화되며 기분좋은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고, 성배를 찾기 위해 밀림에 들어와 모기에 시달리던 해리슨 포드가 떠올랐다. 모기는 닥터 존스의 씩씩한 여친이 접수한다! 
  묵직한 배낭을 맨 50여명의 트래커들이 줄을 지어 울창한 숲길을 걷기 시작했고 20여분이 지나자 첫숙박지가 눈에 들어왔다. 웅장한 산들을 배경으로 탁 트인 초원 위에 서 있는 롯지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숙소를 배정받고 전체 기념사진을 찍은 후 가이드와 함께 근처 탐방을 하는데, 트래킹 내내 모든 설명과 안내는 영어이기 때문에 4명의 가이드 중 젊은 일본청년(카즈) 앞에 얼른 줄을 섰다. 경험 상 유창한 네이티브 스피커보다 외국인 영어가 더 알아들을 만 하다. 뉴질랜드는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어 희귀한 새들이 많았는데, 먹을 것이 풍성하고 천적이 없어서 날 필요가 없고 뚱뚱해져 지금은 나는 능력을 잊었고 찾아보기도 힘들다고 한다. 밀포드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지형이라 나무들이 뿌리를 깊이 내리기 힘들어 뿌리끼리 서로 얽혀 지탱해 가고 있는데 너무 커져서 버틸 힘이 없으면 쓰러져 버린다고 한다. 실제로 거대한 뿌리를 드러낸 체 쓰러져 있는 나무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또 밀포드엔 1년 중 2/3 동안 비가 오는데 이번 트레일에 비가 많이 올 것 같단다.

  트래킹 동안 저녁 식사 전에 음료와 와인 등을 마시며 팀원들끼리 담소를 나눈다. 첫 날이라 국가별로 나와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시작되었는데, 가까운 호주에서부터 미국과 유럽을 지나 코리아 차례가 왔다. 영어울렁증을 밀어내고 그냥 부딪쳐 보기로 했다. ‘영어를 잘 못한다. 집 가까이 큰 산이 있는데 잘 가지 않는다. 이 트레일이 나에게는 큰 어드벤처가 될 것 같다. 무사히 트래킹을 마치기를 기도하고 있다!’ 코리안 다음으로 젊은 말레이시아 신혼부부가 등장했다. 이들은 달콤함 대신 어드벤처 허니문을 선택한 변호사 부부였는데, 여행 내내 무뚝뚝하고 샌님같은 신랑과 씩씩하고 사교성 좋은 신부의 케미를 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다 인사를 마친 줄 알았는데 아직 안했다고 나서는 부부가 있었다. 자신들은 영국인이라고, 브렉시트 때문에 유럽팀에 안 나왔다고 해서 모두들 박장대소! 영국식 유머를 직접 맛 본 이 깨알같은 재미라니^^
  밀포드 트레킹 프로그램 중 만족스러운 점을 꼽는 다면 아마도 훌륭한 디너일 것이다. 자연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된 레스토랑에서 전채와 메인, 디저트로 나오는 코스요리는 정말 훌륭하다. 깊은 오지 숲 속에서 이 정도의 고퀄리티의 음식을 맛보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다들 너무도 만족스러워 했다. 마치 오지탐사를 마치고 기지로 돌아온 귀족이 된 기분이랄까? 기분 좋은 식사를 마치고 나지막한 빗소리와 칠흙같은 어둠에 마음이 설레었지만 다음날 6시부터 아침식사, 7시 30분 출발이므로 서둘러 잠을 청했다.
  기상알람소리에 깨어 밖을 내다보니 짙은 안개가 드리워진 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7시 30분에 맞춰 출발준비를 마쳤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출발한 상태였다. 카즈는 자신이 마지막 가이드이고 뒤에서 체크하며 따라간다고 출발을 독려한다. 체력도 별로고 다리도 짧은데 뒤처지면 어떻하나 조급증이 발동하기 시작해 발걸음이 빨라졌지만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금새 즐거워졌다. 조금 더 가다보니 무릎이 안 좋아 조심스레 걷는 노부부를 앞지를 수 있었고, 마음이 한결 놓이기 시작했다.
  이제 트래킹을 즐길 차례다.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하고 푸르른 숲 속에 잘 닦여진 오솔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숲을 빠져나오면 여기저기서 폭포가 흘러내리는 웅장한 산들로 둘러싸인 초원이 펼쳐진다. 반지의 제왕의 촬영지였다는 것을 금방 알게 해 주는 풍경을 만날 때면 어디선가 호빗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깊은 숲 속의 고요 속에 갇혀 있을 때는 주라기 공원의 긴장감도 맴돈다. 아동기적 상상을 마음껏 즐기며 모험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즐거움은 덤. 연신 이어지는 아름다움 풍광 앞에서 어메이징을 연발하며 배낭의 무게감도 발목의 저릿함도 다 날라가 버린다.
  비는 온종일 내렸고 트레일에는 빗물이 그득해 걷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갓길로 걷느라 안간힘을 쓰는 나를 본 카즈가 ‘곧 젖게 될거니 그냥 편히 가라’고 한다. 여행 온다고 새로 구입한 등산화를 젖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그동안의 수고가 허망해 지며 풍덩 담기는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점점 발목과 정강이, 무릎 위까지 차오르는 물길을 걸으며 오히려 후련해졌다. 모두들 이럴 줄 몰랐던 재미를 나누며 물길을 걷고 있는데, 1미터 남짓한 뱀장어가 무리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나오기도 했는데 자기소개를 하며 불현 듯 튀어나왔던 ‘어드벤처’가 펼쳐지는 순간 같아서 판타스틱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마법에 걸려 슬픈 비밀을 간직한 채 떠도는 아라곤의 후예일지도 모른다!
 밀포드 트레킹 동안 머무는 산장에는 샤워 뿐 아니라 빨래와 건조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젖은 의류와 신발은 다음날 바로 입을 수가 있다. 공동 빨래터에 모여 수다떨며 빨래하고 잘 마르는 곳을 찾아 옷가지와 신발을 널고 챙기는 일은 또 다른 재미거리다. 샌님같은 말레이시아 신랑이 빨래를 생전 처음 해보는지 혼자서 영 서툴고 굼뜨게 옷가지를 조물거리고 있었다. 신부한테 쿠사리 듣고 다시 오지 싶어 훈수를 좀 두려고 했는데 영어가 딸려 그만뒀다. 다음날은 밀포드 트래킹 중 가장 힘든 날로, 해발 1098m에 이르는 맥키넌 패스를 오르고 하산 후 밀포드에서 가장 유명한 서덜랜드 폭포를 보러 왕복 1시간 반을 또 달려야 한다. 산장 너머로 폭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내리고 밀포드 왕국의 신비는 더욱 더 깊어만 간다. 
 트래킹 사흘째, 남편이 이틀간 메고 다닌 박카스를 마시고 양쪽 무릎과 정강이를 파스로 장전하고 가장 힘들 하루를 시작한다. 비가 개어 청명하게 파란 하늘은 이틀간 빗길을 걸었던 밀포드 원정대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인 듯 싶었다. 우비를 벗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대자연의 품 안으로 내 몸의 속도에 맞게 한발씩 내딛는 발걸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을 주었다. 지겹게도 싸워오며 산전수전 겪어낸 남편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어린시절 동요를 기억하며 함께 흥얼거릴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되어서 참 다행이고 감사했다.

 밀포드 트레일은 이 폭포를 보기 위해 개발되기 시작했다고 하는 유명한 서덜랜드 폭포에 올라가볼 차례가 됐다. 폭포가 가까워지자 찬 기운이 맴돌고 으르렁 거리는 굉음이 주위를 감싼다. 계단을 올라 폭포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바람치는 파도에 파묻힐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고 체 10초를 버티지 못하고 서둘러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잠깐 동안의 물세례에 온 몸이 흠뻑 젖어 버렸고 스며드는 냉기로 부르르 떨며 혼비백산해 있는 우리 모습을 하필 카즈한테 들켰다. 손뼉을 치며 재미있어 하더니 자기도 오랜만에 보러 왔단다.
 나흘째는 33.5 마일의 밀포드 트레일을 완주하고 보트를 타고 밀포드 사운드로 이동하는 날이다. 다시 비가 쏟아졌지만 우비만 입으면 그만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하며 밀포드에서의 마지막 트래킹이 벌써 아쉬워지기 시작한다. 연록색 이끼로 끝없이 이어지는 오솔길, 울창하게 늘어진 열대우림, 여기저기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와 시냇물, 깍아지른 절벽과 바위들,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구름들, 밥먹고 수다떨고 사진 찍어주며 친해진 멤버들과 가이드들 모두가 귀해 보인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을 것 같던 트레일은 ‘샌드플라이 포인트’에서 끝이 나고 보트를 타고 밀포드 트레일을 빠져나왔다. 밀포드 사운드에서의 마지막 숙박과 만찬은 여정을 마친 서로를 축하하고 격려해 주는 시간이다. 전쟁터에서 귀환한 전사들처럼 훌러덩 까진 뒷꿈치와 빠진 발톱을 보여주며 무용담을 나눈다. 양쪽 새끼발톱이 빠질 지경으로 흔들거리는 남편은 무탈하게 트래킹을 마친 대한민국 아줌마의 저력에 내심 놀라는 눈치였는데, 배낭 2개 짊어지고 업고 갈 걱정을 했었다나 어쨌다나..
 마지막 날은 밀포드 사운드 크루즈 관광이다. 원정을 마치고 돌아와 호사를 누리며 함께 한 기억을 나누며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5일간의 아름다운 시간이 끝난다는 게 너무도 아쉽고 꿈만 같았다. 밀포드 트레일을 걸은 발, 밀포드의 아름다운 자연을 본 눈, 숲속의 새소리와 폭포소리를 들은 귀의 기억은 꾸역꾸역 살아갈 일상에 생기와 활력을 줄 거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엔 또 어디를 걸을까? 앞으로 얼마나 더 걸으며 행복할 수 있을까? 샘솟는 기대와 욕심은 푹 익은 중년의 맥박을 뛰게 한다. 젊은 날은 품어보지 못했던 흥분과 상상에 몸을 맡기고 돌아오는 귀국길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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