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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 공동체와 작은학교 -정유성_20010928 (200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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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사무처 작성일15-12-23 14:43 조회1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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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 공동체와 작은학교

정유성(서강대학교 교수)


하나, 들며: 사람의 위기, 삶의 위기의 현장
- 왜 농어촌 공동체 교육인가?

우리 사회는 유례없는 변혁의 시기를 맞고 있다. 세계화, 정보화 같은 전지구적 차원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야 하는 동시에, 그동안 지나치게 양적인 성장에 치중하느라 소홀히해 온 사회 여러 부문을 개혁하여 다가올 21세기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하지만 새천년을 코앞에 둔 지금, 여기 우리 사회는 이러한 과제를 감당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치어 흔들리고 있다. 이를테면 국민의 정부 들어서서 이런 저런 개혁을 꾀하기는 하지만 워낙 상황이 어려운데다 누적된 모순들이 버거운 나머지 사회 전반의 삶이 개선될 전망은 멀기만 하다. 차라리 섣부른 개혁에서 오는 또 다른 위기의 예감마저 든다. 개발독재시대에 경제발전의 논리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경제회생의 논리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드는 경제제일주의적 경향부터가 그렇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문제의 핵심부터 파악하고 위기의 근본에서부터 극복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사람의 삶'''',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밑바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 우리가 맞고 있는 이 위기는 그동안 잘못된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등의 제반 문제들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결국 사람의 위기, 삶의 위기라고 할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삶,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의 밑바탕이 되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위기가 가장 심각한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농어촌 공동체의 교육이다. 수천년 동안 사람의 삶,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의 밑바탕이었던 우리 농어촌 공동체의 지역사회는 지난 한 세대 남짓 동안 마구잡이로 추진한 졸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사람은 떠나 공동화하고, 삶의 터전은 황폐해지고 말았다. 국민총동원 체제처럼 위로부터 조직되고 추진된 산업화, 도시화의 행진에서 뒤쳐진 농어촌 공동체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부문에 걸쳐 침체되고 낙후되었지만, 특히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되었다. 그중에서도 교육부문이 전형적이다. 어디서고 산업화과정에서 도시지역에 비해 사회문화적인 소외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농어촌 공동체에서는 그나마 이를 보완하고 또 보상할 수 있는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크다. 왜냐하면 농어촌 공동체야말로 나름대로의 삶의 터전을 지탱하고 지역의 사회문화적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중앙 집중적인 교육 운영방식을 고수하고 강화해 온 우리 사회에서는 도시중심의 교육정책, 산업인력 양성에 치중한 교육내용으로 처음부터 농어촌 공동체와는 유리된 교육을 해왔다. 게다가 지난 몇 년 동안 가뜩이나 공동화된 농촌에 이른바 교육재정의 효율화를 위한 폐교조치 같은 무리한 정책을 무차별하게 추진한 결과 농어촌 공동체는 삶의 기반, 생활세계의 바탕조차 무너지고 있는 형편이다.
언제나 모순이 가장 첨예한 곳에서 그 해결의 노력이 싹트고 전망이 열리게 마련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농어촌 공동체의 교육을 거듭 나게 하는 일은 비단 우리 교육을 바로 잡는 일일 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 사회 전반의 위기를 그 위기의 한복판에서 극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발상부터 전환해야 한다. 이를테면 여전히 횡행하는 경제제일주의의 논리로는 이미 낙후한 농어촌 공동체, 그리고 소외된 이 지역의 교육을 거듭나게 할 새로운 출발을 다질 수 없다. 굳이 당면한 위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시급한 과제는 급속한 산업화로 공동화된 농어촌 공동체의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며, 또한 그동안 가장 왜곡된 ''''생활세계의 식민화(Kolonialisierung der Lebenswelt)''''의 현장으로 지적되어 온 교육의 현장에서의 개혁과 삶터 안에서의 실천을 통한 ''''생활세계의 탈식민화''''이다.
하지만 이는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대안적인 문제를 보는 시각과 문제접근, 그리고 그 해결을 위한 실천으로서만 가능하다. IMF 체제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산업화 시기처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분업체제에 돌입하기 위한 졸속한 노력으로는 세계화나 정보화 같은 시대적 요청에 제대로 부응할 수 없다. 그 대응책은 역설적이게도 주민자치 원칙에 따라 지역주민들이 주체가 되고 지역 특성에 맞게 특화된 지역사회의 자율적이고 내발적인 추진력에 의한 개발, 곧 ''''지역화를 통한 세계화(glocalization)''''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지나치게 양의 논리, 도시중심의 시각에 매몰되어 지역특성을 살리고, 지역주민이 주체가 되는 지속가능한 지역사회의 발전은 등한시해 왔다. 오히려 새마을 운동부터 최근의 ''''돌아오는 농촌 만들기''''와 같은 일방적으로 위로부터 덮씌우는 개발전략에 급급했다. 이제라도 대안적인 시각과 실천과정을 아우른 농어촌 공동체 발전의 모범유형을 개발하고 또 실천하는 일은 전반적인 우리 사회의 위기극복에 관건이 될 것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의 모범유형을 지역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지역 특성에 맞게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은 그 자체가 교육적인 활동이다. 교육은 비단 한 사회의 요구대로 그 구성원들을 사회화하는 보수적, 순응적 기능 뿐 아니라 위기에 처해 그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고 나아가서 그 사회의 틀과 가치체계를 바꾸어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변혁적, 능동적 몫을 하는 인간의 본원적인 사회활동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제도화된 학교교육의 틀에 갇힌 교육으로서가 아니라, 참여하는 사람 스스로가 주도하는 생활세계 한복판에서 벌이는 삶의 활동으로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에서는 이러한 지속가능한 발전의 중심으로서 농어촌 공동체의 교육모델로서 ''''작은 학교''''운동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짚어보려는 의도에서 쓴 것이다.

둘, 살피며: 농어촌 공동체 해체와 교육의 피폐상
- 어떤 발전이며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

지금, 여기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고 그 목표달성을 위해 헌신했던 산업화의 막바지에 우리 사회는 오히려 유례없는 위기를 맞고있다. IMF의 긴긴 터널을 지나는가 싶더니 삶터는 온통 흔들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뒤틀리고 있다. 결국 그동안 ''''더 크게 더 많이 더 빨리''''라는 산업화 시대의 양적 성장의 신화에 눈이 어두워 앞뒤고 옆이고 돌아보지 않고 내달아온 끝에 우리 사회는 인간성 상실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마저 닥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난 세월 동안 돌보지 못했던 소외지역, 영역, 인간집단이 가장 먼저 그 위기에 휩쓸리는 일만 봐도 그렇다. 그 대표적인 자리가 바로 농어촌 공동체이다.
우리는 채 40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수천년간 우리의 삶의 바탕이었던 농어촌 공동체를 초토화하고 그 폐허 위에 산업화라는 사상누각을 건설해 왔다. 특히 그 대표적인 영역인 농촌만 봐도 그렇다. 초기 산업화 단계인 60년대부터 균형있는 발전보다는 농촌경제의 침체와 낙후를 감수, 아니 전제한 졸속한 경제정책으로 일관해 온 것이다. 이미 70년대에 우리 농촌은 전체 경제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농업과 농민의 소외를 불러왔고, 그나마 자생적인 극복의 움직임조차 ''''강제농정''''이라는 개발독재 특유의 경제논리에 압살당해 농촌경제는 거의 고사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정부는 이른바 범국가적 지역사회 개발사업인 ''''새마을 운동''''을 벌여 국민 총동원 체제를 방불하게 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새마을 운동은 "농촌의 빈곤탈피와 국가의 근대화를 위한 농촌 하부구조 개선"을 목표로 한 "거국적인 사업"을 표방했지만, 그 내용을 뜯어보면 "일종의 파시즘적 이데올로기"의 표현으로서, 민중 통치체제의 수단으로 악용되었으며 전시효과 위주의 농촌 하부구조 조성사업에 치중하고 "강제 증산농정을 위한 농민통제의 이데올로기이자 기구"로 봉사하기조차 했다. 결국 농촌을 도시중심의 산업화 정책의 병참 기지화 하는 전략이라는 한계가 뚜렷한 새마을 운동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이를 통해 우리 농어촌 공동체는 80년대 들어오면서 거듭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졸속한 대외 지향적, 수출 주도적 산업화가 가속화되고 허울좋은 자유화와 개방의 물결에 밀려 우리 경제의 기본방향 또한 ''''개방 경제체제''''로 설정되면서 이에 따른 ''''개방농정''''이라는 농업정책의 변화가 가뜩이나 피폐한 우리 농촌의 경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게 된다. 결국 80년대의 농촌문제는 이제 "농촌이 빨리 발전하느냐 아니면 더디게 발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될 정도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이렇게 이미 위기가 싹튼 90년대 들어서면서 등장한 문민정부는 말로는 신한국 건설을 위한 신농정을 구호로 내걸고 무엇보다도 ''''돌아오는 농촌''''을 만드는 정책을 편다고 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기만 했고, 문민정부 전체의 농업정책은 한마디로 "농정의 부재"로 규정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시각이나 접근, 해결의 모색이 아니라 선진국의 첨단기술농업, 수입을 전제한 수출농업, 고품질 농업, 규모영농 등 산업주의적 방식에 의한 또 다른 생산 효율주의 원리에 따른 농업정책을 추진했고, 이는 거듭 경쟁적 과잉생산, 농업위기를 낳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우리 농촌경제는 결국 우리 사회전반에 걸친 위기의 근본원인이 될만큼 피폐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사회체제 부문간 불균형 발전이라는 면에서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안게 된 것이다.
농어촌 공동체의 피폐는 비단 위에 요약한 경제적 측면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누적된 농업위기와 이를 해결하려는 졸속한 산업주의 및 기술주의적 접근의 악순환을 통해 미증유의 생태위기를 낳았다. 바로 끊입없이 혁신되는 산업기술적 방식을 통한 "화학농법, 기계영농, 단일작물의 밀집, 연작농법 등 한마디로 부존 에너지 파괴적 규모지향의 농업"의 가속화로 "생태계의 대량학살의 한도 안에서만 한시적으로 얻어진 다수확"을 추구하다가 총체적인 위기를 자초한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생태계 파괴를 통한 총체적 위기는 인간 및 사회의 도덕성의 파괴와도 이어진다. 더욱이 이러한 생태계와 가치체계의 위기와 더불어 농촌 지역사회의 삶터는 폐허가 되었다. 일찍이 졸속한 산업화의 결과로 도시중심의 경제, 정치, 사회체제에 의해 ''''식민화''''된 농촌 지역사회의 ''''생활세계''''는 이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장 구체적이고 기본적인 일상생활 공간에서부터 인간관계, 주관들의 자기정체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공동화, 황폐화, 형해화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지역사회의 ''''해체''''"라고 해야할만큼 심각한 인구유출을 통한 농촌 공동체의 삶의 터전 자체의 공동화와 황폐화를 들 수 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앞서 살펴본 경제적 측면의 영세화, 궁핍화 뿐 아니라 보건, 의료환경, 주거환경, 교육환경, 교통 및 문화영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활영역의 낙후, 침체, 소외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중에서도 교육과 관련된 삶터의 식민화가 가장 두드러진다. 먼저 지난 산업화 과정에서 충실한 산업역군 양성에 봉사하며 획일적이고 경직된 교육의 조직과 운영방식, 그리고 교육내용을 고집해 오면서 농어촌 공동체는 철저히 소외되었다. 무엇보다도 무차별하게 산업화로 치닫는 과정에서 도시중심의 교육체제, 교육내용이 농촌 지역사회에 여과없이 부과된 것이 그렇다. 그 결과 교육은 농촌 지역사회의 소외를 극복하고 이를 보완, 보상하며 나름대로의 사회문화적인 정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을 다지는 제 몫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가뜩이나 피폐한 농촌의 생활세계에다 정신과 영혼의 식민화를 강화하는 노릇마저 하게 되었다.
교육을 통한 농촌 지역사회 생활세계의 식민화는 다양한 삶의 영역에 나타난다. 특히 도시와 농촌의 지역격차를 심화시키고 농촌을 공동화하며 지역주민들을 소외시키는 일들이 그렇다. 이를테면 교육환경, 교육결과, 교육과 농가경제 등 삶과 관련된 주요 영역에서 도농간의 격차가 두드러진다. 가뜩이나 계층에 따른 재생산의 정도가 심한 우리 사회에서 농촌 지역사회는 그 자체로 낮은 계층의 교육환경의 전형을 보인다. 가정 학습환경, 지역사회의 지원, 학교의 학습환경 모든 면에 있어 열악하기 짝이 없는 상황 등이 그 예이다. 교육결과와 관련된 학력편차나 진학률 등에 있어서도 도시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게다가 피폐할대로 피폐한 농가경제에 교육비 지출이 주는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교육내용마저도 도시중심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농어촌 공동체의 삶을 소외시킨다. 이렇게 밖에서 겉모습만 봐도 온통 문제투성이인 농어촌 공동체의 교육상황은 그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당사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황폐하기 이를데 없다. 한마디로 교육은 농촌 지역사회 주민들의 자기 존재에 대한 폄하와 부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살펴본대로 우리 농촌 지역사회가 경제적인 침체와 낙후는 말할 것도 없고 생활세계 전반의 식민화를 통한 황폐화, 그리고 정신과 영혼의 피폐상을 겪게 된 것은 그렇다고 지난 산업화 과정에서의 농업정책의 실패와 같은 문제에서 연유한 것만은 아니다. 이는 따지고 보면 더욱 근본적인 시각, 접근방식의 결손과 왜곡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인간영혼의 요구와 친자연적인 생명가치를 철저히 무시하는 토대위에서 전개되어온 산업주의"에 굴복하여 "서구식 물질주의와 그 번영의 방식을 고스란히 떠받들고 본따려는 일"에 매몰된 우리 산업화 과정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말 그대로 발상의 전환, 삶의 근본가치의 전환을 해야한다. 이는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우리의 삶을 제약하는 모든 체제의 가치전환과 함께 하지 않고 농업의 제문제와 그 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가장 모순이 첨예한 곳에서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고 그 구체적인 해결을 도모함으로써 그 핵심적인 전환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이다.


셋, 찾으며: 새로운 농촌개발 전략과 공동체 교육
- 가장 가까운 삶터에서의 탈식민화

이제 더는 우리 농어촌 공동체를 이대로 둘 수 없다. 그래서 개혁이 필요하고 또 그것을 밑에서부터 실천하여 실현시키는 지역사회의 운동도 절실하다. 그러나 섣부른 운동으로 가뜩이나 피폐한 우리 농촌의 깊은 병을 악화시키기 전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백척간두에 선 위기의식과 아울러 문제에 대한 분명한 비판적 성찰을 해야한다. 그것도 밖으로부터의 문제제기나 분석이 아니라 당사자 스스로의 문제인식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전반에 가득한 안팎의 혼란과 모순들을 삶터 곳곳에서 당사자들이 제대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또 제기해야 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혼란과 모순의 극복과 타개는 말할 것도 없고 각자 선 자리에서, 구체적인 삶터 안에 새로운 삶의 방식, 삶의 문화를 만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피폐해진 생활세계를 그 한가운데서 회복하는 당사자 중심의 ''''생활세계의 탈식민화 운동''''인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사람다운 삶을 받쳐주고, 더불어 사는 삶터를 만들어 온 ''''공동체 의식''''을 되찾는 일이다. 문제가 심각하고 상황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이 공동체 의식이라는 우리를 사람답게 살게 하는, 우리 삶터를 사람답게 되살릴 ''''잃어버린 마음''''부터 되찾아야 한다. 그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일은 다름 아닌 그 ''''첫마음, 첫뜻''''을 되새기는 일부터 비롯된다. 왜 사람은 홀로 살 수 없고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하며, 또 그 참뜻은 무엇인지 말이다. 이렇게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고, 그 첫마음 첫뜻을 되새기는 일은 무엇보다도 사람 마다의 애씀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뼈를 깎는 자기성찰과 끊임없는 따로 또 같이 하는 배움의 과정이며 사람다운 삶을 되살리는 거듭남의 과정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공동체 의식의 첫마음, 첫뜻은 대체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잃어버리고 나니 이토록 함께 사는 삶이 어렵고 아플까? 어떻게 이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런 물음들을 던져 볼 차례다. 먼저 공동체성이란 대단한 구호나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이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이란, 사람의 본디 생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으로 나서 사람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 사람으로, 사람답게 키워져야 사람이 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의 모습을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 간다. 이렇게 공동체를 끊입없이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공동체성, 공동체 의식이라는 그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의 첫마음과 첫뜻을 거듭 새기게 된 것이다.
그 첫마음, 첫뜻은 대체로 이렇다. 공동체란 그저 함께 모여 사는 삶같은 집단생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판을 치고 있는 피붙이, 땅붙이, 학교붙이 같은 특정한 공간에 갇혀진 집단의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란 그것을 넘어 사람끼리의 본질적인 존재의 만남과 사귐, 그리고 나눔과 섬김에 바탕한 뚜렷한 가치지향성을 뜻한다. 여기서 사람은 어떤 노릇이나 몫, 구실로 새긴 것이 아니라 있는 그 자체로, 또 사람사이는 사람들끼리의 지역성, 연관성, 시간성을 넘어 온 존재를 아우르는 전체성, 총체성을 뜻한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사람의 함께 모여사는 삶의 꼴이 달라지면서,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산업화를 통한 근대화 과정에서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공동체가 무너진 폐허 위에 세워진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본주의 전개과정은 곧 공동체의 해체과정인 것이다. 자본주의 산업화를 통해 만들어진 현대사회는 처음부터 공동체성과는 서로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사회이다. 그런만큼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공동체의 해체 탓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현대사회의 낱개로 흩어진 사람, 뒤틀린 사람사이를 제대로 되살리려면 무엇보다도 공동체를 먼저 되살려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와서 잃어버린, 사라져버린 공동체가 고스란히 손쉽게 되살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 첫마음, 첫뜻으로 돌아가 잃어버린 공동체를 되살리되 그것은 옛것을 되살릴 뿐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성을 만들어가는 일이어야 한다. 특히 우리 사회처럼 오래된 새모순과 새로운 옛모순이 뒤섞인 삶의 터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 사회는 워낙 빠른 산업화와 사회변화 탓에 공동체 의식이 하릴없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사라진 정도가 아니라 한 술 더 떠 오히려 ''''집단적 퇴행''''이라고 불러야 할만큼 반공동체적인 파편화된 개인주의적 관행이 판을 치는 병리적인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런만큼 그 안온한 품이 너무나 그리운 나머지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또는 화석처럼 굳어진 공동체 전통에 헛되이 기대거나 있는 것처럼 지나치게 기대하는 버릇조차 있다. 이를테면 걸핏하면 내세우는 ''''민족''''같은 추상적으로 큰 단위의 공동체에 대한 맹신이나, 여전히 판을 치고 있는 피붙이, 땅붙이, 학교붙이들끼리의 배타적인 패거리 짓기같은 것이 그렇다. 지금 당장 공동체가 아쉽고 그립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위에서 덮씌우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 기회에 한사람 한사람이 우뚝 홀로 서고, 서로 평등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하는 그 첫마음, 첫뜻을 새로 새겨 앞날을 열어갈 공동체를 만들어 가도록 해야 한다. 결국 결론부터 앞당기자면 지금, 여기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공동체로부터의 해방이나 공동체로의 회귀와 같은 일방적, 일회적 과정이 아니라 ''''공동체로의 해방''''과 같은 역설적 과정을 통해 사람의 뜻을 새롭게 새우고 사람의 삶을 되살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바로 전형적인 반공동체적인 삶의 현장인 교육에서부터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모든 세상의 가름과 나눔, 그리고 찢겨짐의 비롯이 학교요, 또 교실현장이기 때문이다. 모순이 가장 첨예한 곳에서부터 그 해결과 극복의 노력을 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닫힌 학교, 막힌 교실에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학교를 열고, 교실에서 아이들이 제 삶을 살도록 틔워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교육과 학교를 보는 눈부터 새롭게 떠야 한다. 이제 학교는 섬처럼 고립된 배움터가 아니라 "삶과 체험의 터전Schule als polis"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또 학교는 더 이상 교사와 학생 사이의 상호작용만 일어나는 곳이 아니라 지역과 주민들의 사회문화적인 중심으로 온갖 정보와 문화와 사람들이 오가고 모이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새천년을 눈앞에 둔 지금, 여기 이른바 문명전환의 새물결이 밀려오면서 교육에 주어지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이다. 또 다른 한편 가뜩이나 나뉘고 갈라진 세상에서 그 가름과 나뉨을 교육이라는 삶터 한복판, 학교라는 현장에서 극복해 학교공동체로 만들어 내는 일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교육개혁이며, 나아가서 삶터 전체를 되살려 내는 사회개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학교공동체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민자치, 영역자치, 생활자치의 장이 되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위로부터 덮씌워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가장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당사자들 스스로 나서서 문제를 인식하고 제기하며 그 해결을 꾀하는 공동체는 서로 살리는 ''''상생체(相生體)''''로부터 비롯된다. 학교공동체는 이렇게 교사,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학부모 나아가서 지역주민들 모두가 함께 학교를 만들고 이끄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학교공동체는 나아가서 지역에 뿌리내린 사회문화적인 공간이다. 이제 학교는 교육의 장으로 닫히고 막힌 곳이 아니라 지역과 모든 차원에서 활발하게 교류하는 열린 공간, 그리고 지역의 사회문화적인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학교를 지키고 또 키워가야 한다. 최근에 말썽이 되고 있는 소규모 학교의 통폐합 정책은 이런 뜻에서 비교육적이며, 반공동체적이다. 학교의 크기가 아니라 지역사회와의 관계에서 그 존폐를 결정해야 한다. 지역에 자리하고 뿌리내린 학교야말로 학교공동체의 바탕이다.

넷, 나며: 작은학교에서 세계가 보인다
- 농어촌 공동체 작은학교의 대안교육적 의미

이상 살펴보고, 찾아본대로 농어촌 공동체의 해체와 나란히 맞물린 교육의 피폐상, 그리고 생활세계의 식민화는 바로 그 자리인 교육에서 학교공동체를 만들어 탈식민화하고 이를 통해 농어촌 공동체라는 삶터를 되살려야 극복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학교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 농어촌 지역사회에 마지막 보루로 남아있는 작은학교를 지키는 일부터 시작이다. 왜냐하면 이 작은학교는 그 자체로 교육의 본원적 의미, 농어촌 공동체의 본질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인 공동체성, 사람다운 삶을 지탱하는 공동체 의식, 이것을 되살리려면 무엇보다도 농어촌 지역의 피폐한 삶터를 다시 한 번 추스르고 거듭 나게 할 수 있는 정신과 영혼의 힘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서 폐쇄된 집단의식, 매몰된 지역성이 아니라, 열린 공동체로의 해방을 통한 새로운 더불어 사는 삶터를 일구는 주민성, 지역성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끼리의 본질적인 존재의 만남과 사귐, 그리고 나눔과 섬김에 바탕한 뚜렷한 가치지향성이다. 지역성, 연관성, 시간성을 넘어 온 존재를 아우르는 전체성, 총체성으로서 말이다.
이것을 삶터에서 벗어나고 공간적인 거리 뿐 아니라 물리적, 정신적, 문화적 거리를 두고 소외된 크기에 따른 통폐합된 학교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지금, 여기 산자수명하고 안온한 자연의 품에, 그리고 삶터 한복판에 자리한 작은학교에서만 가능하다. 작은학교는 이렇게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과 영혼, 문화와 삶의 문제이다. 농어촌 공동체의 회복과 작은학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본질적 관계이며, 이는 나아가서 우리 사회 전체의 앞날을 가늠하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작은학교의 문제는 비단 교육내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전반의 미래상과 연관된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요즘 거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대안교육과의 관련성을 짚어보자. 하다못해 지금 10개 이상 만들어진 대안학교들은 예외없이 모두 농어촌 공동체 품 안에 자리하고 있다. "더 크게, 더 많이, 더 빨리"라는 지극히 반교육적인 산업주의의 표어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제도교육의 틀에서 벗어나 교육다운 교육을 실천하려면 이러한 농어촌 공동체 품 안으로 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 학교들은 한 반에 20명을 넘지 않는 작은학교들이다. 대규모 물량위주의 제도교육의 폐해를 이런 작은 교육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밖에 학교형태를 따르지는 않지만 대안교육을 추구하는 다른 현장들도 마찬가지이다. 농어촌 공동체의 본디 뜻인 생명중심, 사람중심의 지향성과 그 실천에 있어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사귐이 가능한 작은 교육의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모든 대안교육의 노력의 특성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사회로 보나, 교육으로 보나 농어촌 공동체의 작은학교는 살리고, 보살피고, 돌보아 진정한 교육의 삶터로, 그리고 더불어 사는 새로운 삶터의 중심으로 삼아야지 결코 없애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자연을 보호하듯 작은학교를 무작정 지키고 있어서도 안된다. 작은학교를 열고 그 안에 삶과 문화를 담아내는 노력을 기울여 우리 교육과 사회의 앞날을 예견하고, 실천하는 미래지향적인 교육의 장, 삶의 장으로 만들어야 하는 의무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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