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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공동체와 농어촌 소규모 학교(200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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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사무처 작성일15-12-22 13:40 조회1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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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공동체와 농어촌 소규모 학교

장호순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교 교수)

우리나라 헌법은 모든 국민에게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따라서 교육은 소수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니다. 잘살던 못살던, 잘났던 못났던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할 권리인 것이다. 부모를 잘만나 머리가 좋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만이 교육의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다. 특히 정부가 제공하는 공교육은 소외된 사람들을 공동체의 품으로 끌어안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인간사회에서 교육이란 약한자와 강한자가 동등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장치이다. 이를 통해 공동체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교육이란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동물도 자식들에게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기술을 가르치고, 인간도 생존방법을 가르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이나 동물이나 생존을 위해 사냥하고 후세를 위해 번식하는 것은 굳이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교육이 동물의 생존훈련과 다른 점은 내종족만의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공존 방법을 가르친다는 점이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주변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점이다. 인간은 지식과 기술 뿐만아니라 습관, 가치, 태도, 예절 등도 교육을 통해 후대들에게 전달해왔다. 그래서 교육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하나의 양식이 되었다.
"당신의 자녀가 장차 성공한다하더라도 결코 혼자서만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의 자녀에게는 자신을 보호해줄 경찰관도 필요할 것이고, 치료해줄 의사도 필요할 것이고, 권리를 지켜줄 변호사도 필요할 것이고, 집앞을 청소해줄 청소부도 필요할 것이다. " 미국 유학시절 필자의 딸이 다니던 학교의 복도 한쪽 벽에 붙은 포스터에 써있던 귀절이다. 교육의 목적은 적자생존의 경쟁이 아니라 서로 도움과 공존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말이었다. 학부모들에게 내 자식만 공부잘하면 될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갖지 말라는 교사들의 당부이기도 했다.
냉혹하리만큼 철저한 시장 자본주의 경쟁사회인 미국에서 빈부격차와 계급 갈등의 모순을 완화하는 장치 중의 하나가 바로 교육이다. 적어도 교육에서만은 시장경쟁과 적자생존이라는 자본주의 논리가 상호공존과 약자 배려의 원칙에 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일류대 입시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당사자들이 아닌 이상 입시철이 어느때인지도 모르게 지나간다. 수능고사 몇점을 맞아야 하바드대학이나 예일대학에 들어가는지 알 수도 없다. 대신 미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교육문제는 유색인종, 저소득층, 장애자등과 같은 소외된 계층의 교육문제이다. 인간에게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균등한 기회를 주는 것이 교육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교육은 일등, 엘리트를 위한 교육이 사실상 전부였다. 쳐지는 아이들, 꼴찌, 문제아들은 교육의 담론에서 포기해버렸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결코 일류대학을 나온, 학벌좋은 사람들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의사와 변호사가 필요한 만큼 환경미화원도 필요하고, 건축노동자도 필요하다. 우리사회가 바로서려면 이제부터라도 그들이 우리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포용시킬 수 있는 교육, 즉 평범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교육이 강조되어야 한다. 교육을 통해 소수 몇몇 사람이나 집단 만이 잘사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만족하며 살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교육받을 권리를 부여한 것은 인간은 모두 함게 잘살아야지 결코 혼자서만 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두 함께 잘사는 공존의 교육을 하지 못할 경우 발생하는 개인적 피해와 사회적 부담은 엄청나다. 미국의 경우 범죄자 1인을 교도소에 감금하는데 드는 비용이 하바드대학 1년 등록금과 생활비를 합친 것보다 많다는 통계가 나온 적이 있다.
지난 달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사건으로 15명의 학생과 교사들이 사망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미국사회는 다시 한번 교육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서 점검하고 있다. 특히 학교의 규모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학생수가 너무 많아 학생들간의 교류나 교사와 학생간의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고, 이로인해 일부 불만학생들이 극단적인 행동에 이르도록 방치되고 말았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결국 소수의 학생들에게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지 못함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피해와 정신적 충격이 미국사회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2. 경쟁위주 교육의 문제점
우리나라 역시 잘못된 교육으로 인해 심각한 공동체의 붕괴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교육, 특히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논리에 입각한 교육은 적자생존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학생들에게 전수하는데 몰두하면서, 인간으로서 상호 공존방법을 가르치는 것을 소홀히 해왔기 때문이다. 남을 위해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은 바쁜 현대사회에 발목을 잡히는 바보같은 짓으로 여겨졌다. 무조건 남보다 앞서고, 위에 오르는 것을 "성공"이라고 간주했고, 이는 모든 교육현장에서 철저하게 동료들 보다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이 지상목표로 간주되었다.
결국 그렇게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의 독선과 오만으로 우리사회를 망쳐왔다. 이웃이나 후대를 생각않고 자연환경을 망가트리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부정과 비리를 서슴치 않는 세상이되었다. 교육을 많이 받으면 받은 사람일수록 더욱 더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 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우리사회를 심각하게 병들게하고 왜곡시키고, 균열을 가져온 주된 원인이 바로 우리사회의 잘못된 교육에 있다. 우리사회의 교육제도나 교육관이 산업사회의 논리에 치중하고, 교육의 경제적인 측면만을 강조하고 인간적인, 공동체적인 측면을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특히 철저한 정부의 교육에 대한 통제속에서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명령에 복종하는 순종형 시민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했고, 독재정권의 갖은 탄압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사회적으로 만연한 부조리를 보고도 침묵하는 시민이 되었다. 그들은 민주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할 자질이 부족한 수동적 인간이되고 말았다. 당시의 학교는 총화, 단결, 통일 등을 내세우며 획일적인 것이 효율적이고 능률적이라고 강조했다. 덕분에 개인의 독창성이나 창의성, 다양성은 존중되지 않는사회가 되었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독특하고 개성있다고 우대받기 보다는 튀는놈, 개인주의자, 이기주의자 등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그들은 재벌위주의 산업근대화와 권위주의적 정치체제 유지에 알게 모르게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산업사회의 교육논리를 바탕으로 우리사회는 창의 보다는 근면이, 웅변보다는 침묵이,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이, 변화보다는 고정된 것이 중시되는 경직된 사회가 되었었다. 대신 우리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은 남에게 져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경쟁심리였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까지 철저하게 학생들에게 등수를 만들어 주었고, 1등이 되지 못한 아이들에게 열등감을 심어주며 채찍질하는 것이 우리의 교육현장이었다. 당연히 우리의 교육은 무수한 패배자들만을 양성해냈다. 모두가 승자가되는 공존의 교육이 아니라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를 패배자로 만드는 경쟁위주의 교육의 결과였다.
역대 정권이 강요해온 교육모델은 소수 거대 자본이 지배하는 산업사회에 필요한 기계적 노동자를 배출하는데에는 크게 기여했다. 우리의 학교는 지배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수동적 침묵형 인간 군상들을 대량 사회로 배출시켰기 때문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명령에 복종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개혁보다는 명령과 관습을 추종하고, 전체라는 미명하에 개인을 희생시키는 순종적 인간들은 독재정권과 재벌기업이 쉽게 조달해서 사용해온 산업사회의 소모품이었다. 결국 부정과 부패를 묵인하고 , 물질적 탐닉에만 취한 기회주의적 소시민들만이 우리사회에 넘쳐났다. 그리고 그들은 IMF라는 미명하에 고장난 부속품처럼 버려져도 한마디 저항조차 못하는 나약한 존재들이 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그릇된 교육관과 교육제도를 제거하지 않고는 21세기를 맞아 우리사회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선진 민주주의 사회로 진입하기란 불가능하다.
현재의 교육방식으로는 21세기가 필요로하는 인간을 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적자생존의 경쟁사회가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선의의 경쟁을 하는 공존적 경쟁시대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사회가 온갖 부정부패로 병들어 있는 것은 공존을 가르쳐야 할 교육이 살벌한 전쟁터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나와 내 가족만을 생각하고 살도록 학생들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남과 이웃을 배려할 줄 아는 공존형 교육을 시도해야 한다.
3. 지역사회와 교육
현재 정부는 교육개혁의 기치아래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공동체 건설에 입각한 교육보다는 경쟁논리에 입각한 산업사회 교육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다. 특히 IMF경제위기를 맞아 우리사회에서 교육은 더욱더 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한 시장상품이 되어버렸다. 교육개혁이라는 취지하에 추진되고 있는 많은 제도들이 경쟁논리에만 바탕을 두어 교육의 효율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교육의 공존적 측면이 무시되고 있다. 농어촌 작은학교의 일방적인 통폐합이나 소위 일류대 육성에만 치우친 대학교육정책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 소외된 농촌지역의 어린이나 지역사회에 기반을 다지려고 시도하는 지방대학들이다. 가장 열악한 교육환경에 거주한 지역사회 거주 학생들, 그래서 더욱더 많은 교육적 배려가 필요한 학생들이 경쟁논리에 입각해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제약당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지역사회는 심각한 인재유출(brain drain)현상을 겪고 있다. 유능한 인재들은 일찌감치 수도권으로 흡수되어, 지역사회는 엘리트 공동화 현상이 심각하다. 80년대 후반부터 지방자치, 지역사회 발전등의 구호는 요란하지만 막상 지역에서는 일할 사람이 없다. 그래서 지방자치를 한다고 했지만 역시 그나물에 그 밥일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지역사회가 유능한 인재를 키우지 못한다면 그지역이 발전할 수 없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할 인재는 자기 몫만 챙기는 약삭빠른 엘리트가 아니다.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거나 양보하면서 지역사회 전체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일꾼이 많아야 한다.
21세기 지역사회에서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따라서 현재의 경쟁위주의 교육이 달라지지 않고는 결코 우리 지역사회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산업사회 경쟁방식의 교육풍토에서는 지역사회의 학생들은 언제나 서울학생보다 뒤쳐지는 2류 학생으로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지역사회가 재건하기 위해서는 생존경쟁에만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웃을 이해하고,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지역공동체의 재건은 가능해진다.지역사회 재건을 위해 필요한 교육은 단순히 영어단어를 암기하거나 수학문제만을 잘 푸는 영리한 학생들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간이 되게 만드는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지역사회의 교육은 수도권 일류대에 진학할 학생 숫자를 늘리는 것 보다는 지역사회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젊은 일꾼을 길러내는 교육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정책이 달라져야 한다. 각 지역사회 실정에 맞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교육행정의 체계가 달라져야 한다. 선진국의 경우처럼 중앙정부의 교육담당 부처는 규제나 감독이 아닌 지원기능을 해야하고, 교육정책수립및 수행은 일선 교육청과 각급 학교에 맡겨야한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교육부는 독선적으로 교육정책을 수립해 교사와 학부모들에게 강요해왔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지배이데올로기의 전파수단으로 교육을 이용해왔기 때문이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가 되었어도 과거 군사정권시절의 반교육적, 비민주적 독선적 교육행정은 아직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학부모들이 교육정책 수립과 일선교육현장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교사들의 의견이 중점적으로 반영되는 체제로 바뀌지 않는한 실질적인 교육개혁은 힘들다. 특히 대도시와는 판이하게 다른 농어촌 지역사회의 교육환경을 고려할 때, 지역주민들 스스로 필요와 환경에 맞추어 교육방향을 결정할 수 있도록 교육자치가 시급히 실현되어야 한다.
4. 21세기 인재양성과 지역사회 교육의 잠재력
이제 우리사회도 제품생산 위주의 산업사회에서 금융, 서비스등이 중심축이 되는 후기산업사회로 전환하고 있다. 값싸고 튼튼한 물건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기업과 경제의 경쟁력을 의미하게 되었다. 특히 IMF 체제를 거치면서, 변화에 둔감한, 실속이 없는 거대한 겉치레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산업사회의 논리에 따라 충실하게 상급자들의 명령에 복종해 살아오던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로 전락해 생계가 막연해 졌다.
후기산업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 밀어붙이는, 하면된다 식의 산업사회의 논리는 잘 통하지 않는다. 명령에 따라 획일적으로 움직이는 사회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구성원간의 협조와 합의등을 통해 중요사안들이 결정되고, 무엇보다도 창의력, 다양성, 독창성등이 중시되는 사회가된다. 직업사회의 변화도 따를 것이다. 서로 도와야 경제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직장이된다. 최근 많은 직장이 과거의 수직적 부, 과, 계의 체계에서 팀제로 가는 것도 그러한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종신고용제가 없어지면서 이제 대부분의 직장인은 많은 직장으로 옮겨다녀야 한다. 이때 중요한 자질은 물론 남보다 우수한 기술이나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동료사원과 협조해서 임무를 완수할 줄 아는 능력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권모술수에 능한 약은 인간이기 보다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인간성을 갖춘 유능한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21세기를 대비한 우리의 교육은 지적인 능력개발 뿐만아니라 인간적 교류가 중시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즉 지식주입 위주의 교육에서 창의력과 인화력을 개발하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교육은 당연히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학급당 인원수가 적고 교사들의 숫자가 늘어야 한다. 학생들끼리 시험성적으로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교류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교육은 대도시의 과밀학급보다 지역사회의 농어촌의 소규모학교에서 훨씬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창의력이란 다양한 인적교류, 간접경험, 자연과의 교감등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편 첨단 방송, 통신 기술의 발달은 지역적 위치에 따른 교육기회의 불균형을 해소한다. 어디서나 위성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최고수준의 지적 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농어촌 지역사회의 학교는 21세기에 대비해 지식습득과 창의력 개발, 공동체 의식 형성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우수한 교육공간이 될 수 있다.
특히 창의력과 인화력 개발에 필수적인 것이 원활한 의사소통 구조(communication system)이다. 의사소통구조는 교육에서 뿐만아니라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에도 필수적이다. 그래서 의사소통(Communication)과 공동체(Community)는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미국이 컴퓨터 통신망을 이용해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의사소통구조가 다른 어느나라보다도 원활하기 때문이다. 원활한 의사소통은 지시와 명령 체계가 아니라 대화와 합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사회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은 권위주의적 일방형 명령체제였다. 우리사회에서는 말대꾸라는 단어는 매우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일방향 에서 민주적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시대로 변화하고 있다. 국민에게 명령하고 국민의 말을 듣지 않는 정치인은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이다. 소비자의 불만이나 요구를 무시한채 일방적으로 광고만 하는 기업이 번영할 수 없다. 학생들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강의하는 교수가 오래 강단에서 버티기 힘들다. 우리사회의 어느분야에서든 정치를 하던, 기업을 하던, 교육현장에 있던 쌍방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이 없이는 성공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의 교육환경도 권위와 명령에 의한 전근대적 관습을 버리고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바탕으로 한 민주적인 교육현장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현장은 아직도 일방형 의사소통이 대부분이다. 교사의 강의와 명령에 학생들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해야한다. 이러한 일방형 의사소통과정이 민주적인 쌍방향을 바뀌지 못하면서 우리 교육현장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의사소통관행이 우리의 교육현장에서 제거되지 않는다면 이는 학교교육의 문제를 넘어서 21세기 우리사회의 미래도 어둡게 만들 것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에도 후기산업사회에서 쌍방향적 Communication능력없이 성공하기는 불가능 하다. 이것은 단순히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Communication능력이란 남을 이해하고, 많은 정보를 입수해서 선별할 줄 알고,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책도 잘 읽고, 글도 잘쓰고, 말도 조리있게 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권위나 권력에 의해 주위사람을 움직이는 강압형 지도가가 아니라 그들을 설득해서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방적 Communication으로 짜여진 지금의 교육환경은 시급히 개선되어야 한다. 단순한 지식습득이 교육의 전부 혹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지식습득과 아울러 다양한 문제에 반응하고 문제제기하고 평가하고 비판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 그것은 열린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열렸다는 것은 교사와 학생간, 학생과 학생간의 폐쇄적인 의사소통체제가 걷히고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함으로써 원활한 정보교환과 상호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에 기반을 둔 교육제도는 21세기에 필요한 개인적 자질을 배양할 뿐만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재건 나아가 21세기 한국사회가 선진 민주사회로 진입하는데에도 필수적인 것이다.
5. 농어촌 소규모 학교 통폐합의 문제점
현재 교육부는 농어촌 교육환경 개선과 효과적인 교육예산 운용이라는 논리로 학생수 100명 미만의 농어촌 학교를 통폐합하고 있다. 학생들의 교육환경이나 지역여건과는 관계없이 전국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장기원 교육부 학교교육 총괄과장에 따르면 소규모학교의 통폐합은 김대중 정부의 100대 과제로 채택되었고, 지난 8월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따라 과거 시도교육청에 자율적으로 맡겨졌던 통폐합에 교육부가 직접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에에 따라 당초 544개 였던 올해 통폐합 대상학교가 1135개교로 늘어났고, 이중 87퍼센트가 초등학교이다. 농어촌 작은 학교를 일방적으로 통폐합하는 것은 공동체 교육을 포기하고 민주적인 교육도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21세기를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로하는 교육을 거부하는 반개혁적 교육정책의 전형이다.
그러나 교육부는 교육논리에 따라 농어촌 소규모 학교의 통폐합을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규모 학교가 전담교사가 없고, 예체능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복식수업으로 인한 교사의 업무과중등의 문제점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학생수가 적어 학생들의 사회성 형성에 부정적이고 도시지역 학생과의 학력격차가 커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규모 학교의 문제점이 통폐합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지난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실시해온 농어촌 학교의 통폐합 정책은 근 20년이 지났지만 농어촌의 학교교육환경은 더욱 열악해 지고 있다. 교육부는 소규모학교를 통폐합함으로써 도시지역에 버금가는 학교를 만들고 성공한 사례도 있다고 주장하지만 통폐합으로 인해 더욱 교육환경이 열악해 진 곳이 대부분이다.
사실상 교육부가 갑자기 소규모학교 통폐합을 밀어붙이는 것은 금년 8월말로 명퇴하는 교사들로 인해 도시지역의 교원이 크게 모자라기 때문이다. 결국 교육부의 근시안적 교원수급정책으로 인해 농어촌 지역 교육환경을 더욱 황폐화 시키고 학생들의 교육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복식수업의 개선방안이나 폐교가 아닌 휴교와 같은 합리적 차선책은 전혀 고려되지도 않고, 장기적인 농어촌 교육환경 개선방안도 학부모들에게 제시된 적이 없다.
더욱이 소규모 학교 재학생들의 교육환경이나 지역여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100명이라는 인위적인 기준으로 학생과 학부모, 교사와 지역주민의 의견은 고려하지 않은채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가장 비민주적이고 비교육적인 방식으로 농어촌지역 학생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폐교대상 학교의 상당수는 도서벽지 교육진흥법에 따라 국가의 지원을 받아야할 학교들이다.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고 자부하는 이해찬 교육부장관, 그리고 학교교육의 민주화를 앞장서 외치고 있는 교육부 장관의 농어촌 학교 통폐합정책은 군사정권시절과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
농어촌 소규모 학교의 통폐합은 가장 순수하고 인간적인 교육환경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다. 교사와 학생간에, 학생과 학생간에, 그리고 학교와 지역사회간의 친밀성이 남아 있는 곳이 농어촌의 소규모 학교이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선진형 교육, 참교육, 자연교육이 현재 가능한 곳은 바로 농어촌 학교이다. 이러한 귀중한 교육현장을 단기간의 교사수급을 이유로 마구 유린한다면 결국 우리의 교육환경은 복구 불능하게 훼손될 것이다. 이러한 작은 학교들은 대부분 60년대와 7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지은 학교들이다. 지역주민들의 인고의 역사와 교육에 대한 열정이 담겨 있는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일방적인 농어촌학교의 통폐합은 농촌을 재건해야 한다는 국가적 당면과제에도 교육부의 통폐합 정책은 맞지 않는다. 굳이 경제논리로 따진다면 우리는 값싼 농산물을 외국에서 수입해다 먹으면 된다. 그러나 여기에 동의할 사람은 없다. 농촌을 지켜야 한다는 명제를 부정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농촌은 국가사회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돌아오는 농촌"을 만들겠다며 수십조원을 농어촌구조조정 사업에 쏟아부어왔다. 그렇지만 교육부만 유독 교육투자의 비효율성을 내세워 농어촌 학교에 대한 투자를 거부하고 있다. 농촌에서 소를 키우고 돼지를 키운다면 수천만원의 보조금이 지급되지만, 수천만원의 예산을 절감한다고 수십년 전통의 학교를 폐교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농어촌 학교 통폐합에 따른 농어촌 학부모들의 이농, 이로 인한 농어촌의 공동화 현상은 소규모학교 통폐합으로 얻는 예산상의 이익보다 훨씬 엄청나게 국가전체에 피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교육부 관료들 뿐이다.
농어촌 학교의 소규모 통폐합은 우리의 교육행정이 얼마나 근시안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교원숫자를 잘못 예측한 교육부의 실수로 1000여개의 학교에서 10만여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잃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된 것이다. "문앞에 있는 학교를 못가고 거리도 멀고 낯설은 다른 지역의 학교에 간다고 생각하니 잠이 안 올 정도였습니다." 올해 폐교대상으로 선정되었던 충남 아산시 도고면 화천초등학교 6학년 학생의 말이다. 몇년전에 수십억원을 들여 시골분교에서 텔레비젼 화상교육을 하도록 만들겠다고 장담했었는데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농어촌학교의 통폐합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시에서 자녀교육을 시키는 학부모들이다. 소규모학교의 통폐합이 농촌교육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는데 기여할 교육정책인지는 교육전문가나 교육관료보다도 농어촌 지역의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교육부는 그들의 의견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교육부는 두 학교를 하나로 합치고, 통학버스로 아이들을 나르면 된다고 아주 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소규모학교의 단점인 사회성 부족이나 학력부족이 큰 학교에 가면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의 학교, 특히 도시의 큰 학교들은 농촌학생들의 사회성을 저하시키고, 영세농촌가정 아이들의 학력을 더욱 저하시킬 것이다. 통폐합이 되어 좋은학교, 큰 학교로 가면 아이들 교육이 좋아진다는 것은 대부분의 농촌학부모들에게는 달콤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오히려 아이들이 더욱 따돌림을 당하고, 반사회적으로 바뀌고, 학습의욕이 저하될 것이 기 때문이다. 시골의 작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부분 도회지 학교에 나가면 왕따를 당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 어려운 집안의 소외된 아이들이다. 아예 부모가 없는 결손가정의 아이들도 많다. 시골의 작은 학교는 이런아이들에게 유일한 안식처이다. 선생님이나 친구들과 한집안 식구처럼 지낼 수 있는 이런 학교에는 불필요한 경쟁도 없고, 차별도 없다. 비싼 운동화를 신지않아도, 호화스러운 생일파티를 하지 않아도, 보습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기가 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제 시골아이들은 논둑길을 걸어서 다니던 학교를 버리고,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해야한다. 학교가 파하면 실개천에서 고기를 잡고, 논둑길에서 냉이를 캐던 아이들이 이제는 PC게임방에 들러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돌아올 것이다.
통폐합으로 농촌교육환경이 개선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육관료들이 농촌의 교육실정을 너무 모르고 있음을 증명한다. 맹모삼천지교로 잘알려진 중국의 맹자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교육실정을 비판 했다. "현명한 사람은 그 밝은 법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밝게 해주는데, 지금의 교육자들은 흐려진 법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밝게 해주려고 든다." 지금 우리 교육의 현실은 2300년전 맹자가 살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험성적보다는 인간다움이 더 귀중함을 가르치던 학교, 자연을 사랑하고, 함께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던 농촌의 작은 학교들이 멸종되고 있다. 척박하고 왜곡된 우리 교육 현실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희망의 새싹이 무참히 잘려나가고 있다. 21세기 지식사회, 정보사회에 필요한 자질들을 함양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소규모 학교들이 산업사회의 논리에 의해 제거되고 있는 것이다. 그 무지하고 무책임한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교육행정가들이다. 삐뚤어진 교육관을 가진 교육관료들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와 우리사회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물론 지역에 따라 통폐합이 불가피하거나 교육적인 측면에서 적극 추진되어야 할 곳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역의 통폐합은 교육환경에 대한 철저한 연구조사를 바탕으로 교사와 학부모, 학생 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합리적인 절차와 방법을 통해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6. 맺음말
흔히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한다. 백년앞을 내다보고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이는 효과적인 교육을 할 수가 없다. 21세기는 개인의 창의력과 지역사회 공동체가 중시되는 사회로 바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독창성을 배양할 수 있는 교육, 지역사회를 지키고 이끌어나갈 인재를 키우는 교육을 해야한다. 이는 지금까지의 산업사회의 경쟁논리에 입각한 적자생존식의 학생서열화 교육, 지식주입 위주의 교육을 지양하고, 학생들에게 다양한 사고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을 뜻한다. 이러한 교육은 학교 규모가 작고, 학생수가 적은 지역사회의 학교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학생, 학부모, 교사 들간에 원활한 의사소통과 정보교환이 이루어지는 교육환경이 그나마 가능한 것이 바로 지역사회의 학교들이다. 그러나 지역사회 학교의 잠재력이 발휘되려면 시장경쟁위주로 짜여지는 중앙정부의 획일적 교육정책이 달라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일방적인 농어촌학교 통폐합 정책은 지양되어야 한다. 지역여건에 맞게 추진되어야 한다. 중앙정부의 획일적인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재의 교육행정체계에서는 각기 지역의 특성에 맞는 교육을 할 수가 없고, 21세기 후기산업사회가 필요로하는 인재들을 양성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교육의 자치권이 확대되어, 교사, 학부모들이 교육현장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교육행정 체계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지역사회의 학교는 대도시를 앞서가는 21세기에 가장 우수한 교육공간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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