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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1월호/384호] 교육자치_학부모가 교육의 주체로 바르게 서야 할 때 - 각자도생, 학교의 위기를 바꾸기 위하여(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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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사무처 작성일24-01-11 15:29 조회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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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가 교육의 주체로 바르게 서야 할 때

- 각자도생, 학교의 위기를 바꾸기 위하여

 

지금은 강릉의 드높고 새파란 하늘에 탄복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짧지 않은 기간 서울 송파구에서 아이 낳고 살았던 적이 있다. 첫째 아이가 5세 되던 해, 시골살이에 대한 로망을 실현시켜 보겠다고 야반도주하듯 서울을 떠나 강릉으로 이주하였다. 가끔 궁금하다. 9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곳에서 계속 살고 있었다면 나는 어떠한 모습의 학부모가 되어 있었을까 하고.

 

부모가 자녀를 낳아 키우는 과정은 매번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특히 아이가 하나일 경우엔 부모는 (부모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처음인 셈이다. 모두 배 아파 낳은 자식, 마음으로 낳은 자식이며, 소중하지 않은 자식은 없다. 하지만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바랄 게 없다던 부모의 초심은 –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 점점 다양한 욕망의 옷을 입는다. 그리고 그 욕망의 표출은 아이가 커 갈수록 주변을 불편하고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2015년, 첫째 아이가 강릉 면 단위 작은 학교 병설 유치원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유치원이 끝나면 아이들이 노란 버스를 타고 모두 집으로 가 버리는 상황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유치원생 학부모들에게 일괄 문자를 보냈다. ‘노란 버스는 우리 부모들에게(아이를 직접 데리러 가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주었지만, 아이들의 하원 후 놀이 문화를 앗아간 것 같다. 내일부터 하원 후 아이를 노란 버스에 태우지 않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을 테니, 혹시라도 놀다가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놀이터로 나오시라.’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부터 나의 자발적 학교 참여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열흘 정도 꼬박, 외롭게, 놀이터를 지킨 결과, 동급생 아이들 중 5~6명 정도가 매일매일 놀이터에서 놀다 가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게다가 그 모습을 지켜본 초등학교 형·누나들까지 합류, 놀이터 모임의 판이 커졌다.

이후 아이는 인근의 강원행복더하기학교(강원도형 혁신학교로 2021년까지 약 11년간 유지되다가, 2022년 보수교육감이 당선된 이후 더 이상 지정되지 않고 있음)에 입학하였다. 학년별 학급이 하나씩뿐인 면 단위 작은 학교였다. 입학 당시, 반 모임이 매달 (그것도 담임 교사와 함께) 꾸준히 진행되어 왔고 ‘학부모 사랑방’이라고 하는 전체 학부모들의 숙의 모임도 매년 2회 이상 유지되고 있는 엄청난(!) 학교였다. 원래는 학생 수가 적어 당장 폐교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학교였지만, 교육의 혁신을 꿈꾸는 몇몇 교사와 학부모들이 동지적·협력적 관계로 힘을 모아 일구어 낸 희망의 학교였던 것이다.

 

코로나19와 서이초 사태, 그리고 학부모

코로나19 유행이 우리의 일상을 멈춘 사례들은 수도 없이 많다. 대면의 제약이 주는 부정적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아이들에게는 건강하게 관계를 맺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강요받았던 단위 학교 학부모회는 3년 동안 ‘아무 활동도 하지 못했음’을 정당화했다.

그나마 전체 학부모가 가입되어 있는 SNS가 유지되고 온라인으로라도 대의원회(학부모회 회장, 부회장, 감사, 학년 대표, 학급 대표, 동아리 대표가 모이는 회의체)를 지속하려 했던 자녀의 학교에서는 각 학급에서 수렴된 학부모들의 의견들이 종종 학교에 전달되곤 했다. 그런데도 학부모회의 역할은 최소화되었고, 학부모들 간, 학부모와 교직원 간의 소통의 빈도는 현저히 축소되었다. 만나야 할 필요성이 사라졌고 만나서 해결해야 할 일도 그냥 그렇게 덮고 지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만남이 없으니, 표면으로 드러나는 갈등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는 낮아졌고 오해는 늘었다. 각자 생각하고 각자 해결하는 일이 많아졌다.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이 각자도생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2023년부터 본격적인 일상 회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학부모회의 회복은 더디기만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너무나도 익숙 해졌을까, 아님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었을까. 학부모들의 학교 참여가 활발하던 시기에는 마치 저절로 굴러가는 자동차에 몸만 실으면 되는 형상이었다. 하지만 학부모회의 침체기는 한순간에 찾아왔고 그 자동차가 저절로 굴러가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학부모들이 타고 있던 그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건 구성원들의 헌신과 노력, 에너지, 시간 등이 실질적으로 꽤 많이 투입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학부모들의 참여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 와중에 서이초 사태가 발생했다. 교사들의 분노는 여름 내내 가시질 않았다. ‘교사의 죽음은 학부모에게 책임이 있다’고 단순화시킨 명제는 많은 국민들의 암묵적 동의를 얻으며 위세를 키워 갔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소수 학부모의 행태로 전체 학부모가 싸잡아 비난받는 현실에 동의하기 어려워했고,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학교 참여를 건강하게 이어 온 다수의 학부모들은 심한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쏟아지는 분노의 화살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름 내내 교사들의 집단 행동을 숨죽여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가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에 대한 우려와 함께 2학기를 맞이했다.

 

동료의 죽음이 내 일 같다는 교사들의목소리에 ‘충분히 공감하고 애도한다, 함께 해결책을 찾아 보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린 그런 이야기조차 꺼낼 수도 없는 ‘온 국민의 죄인’이 되어 있었다. 학부모인 교사들도 굉장히 많을 텐데……. 학부모들이 어쩌다 사회의 혐오를 받는 집단이 되어 버렸을까. 비판도 적당해야 반론을 제기할 여력이 있는 법. 온 나라가 손가락질하는 이런 분위기에선, 사회와 학교는 건강한 다수 학부모들의 목소리도 들어 줄 여유가 없어 보였다. 단위 학교 교사들은 그동안 적극적으로 학교 교육 과정에 참여해 온 학부모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학부모들은 교사를 응원하는 현수막을 내걸며 교육공동체가 건재함을 보여 주는 퍼포먼스라도 해야 학교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몇 년간 교육공동체 구성원의 역할과 권리 · 의무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학습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교사, 학부모들에겐 적지 않은 변화들이 감지되고 있다. 선배 교사가 후배 교사를 돕고 이끄는 교사 조직 문화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는 현장 교사 이야기에 적잖이 놀랬다. 교사들의 세계도 결국 공동체 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각자도생의 문화라니. 서이초 교사의 죽음에 크게 감정 이입되어 병가를 내고 약을 챙겨 드시며 마음의 불안과 고통을 개인적으로 해결해 보려 하는 교사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학부모들은 또 어떤가. 학교 교육, 학교 참여에 대해 제대로 된 공론장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 몇 년을 그렇게 ‘내 아이’만 바라보고 살아 온 부모들에게, ‘우리 아이들’의 교육을 고민하는 공공성을 가져 달라는 요구가 이해될 수 있을까. 아이들의 관계에서 발생한 갈등은 같은 학년 부모들의 갈등으로 번진다. 급기야 학부모가 ‘당신을 내 아이의 교사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로 교사를 무너지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교육공동체의 주체로 바르게 서자 교육의 주체들이 전반적으로 위태롭다. 학생들은 입시 교육의 한복판에서 친구들과 경쟁하며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아 낸다. 교사들은 그런 무기력한 아이들을 데리고 의미있는 배움을 위해 애써 보지만. 예전같지 않은 학생, 학부모 모두 감당하기 부담스럽다. 학부모들은 ‘우리’의 아이들을 위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여기지만, ‘내’ 아이가 손해 보는 듯하면 참아 낼 수 없으며, 저경력 교사와 교육 공동체로서 ‘함께 성장’해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다.

 

학부모들은 학교와 소통이 어렵다며 늘 ‘폐쇄적인 학교, 준비되어 있지 않은 학부모 담당 교사, 소극적인 학교장 마인드’들을 꼽는다. 학교 측에서 준비가 부족하니 학부모들이 참여 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전해 들은 학교 측의 입장은 어떠할까? 어느 정도 수긍은 할 수 있겠지만, ‘당신들이 똑바로 하면 우리가 이러겠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강원 지역에서 학부모 대상 강연을 할 때마다 빼먹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남’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학교가 변화하기를 바라고만 있으면 학부모들의 학교 참여는 지금처럼 계속 어려울 것이라고.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학부모는 후원회, 사친회, 기성회, 육성회의 이름으로 재정적 도움을 주는 것으로 학교 설립에 영향을 미쳤고, 1980년대 중반부터는 새마을 어머니회라는 이름으로 무한 봉사와 서비스를 제공했다. 1995년 5.31 교육 개혁안을 통해 학부모 학교 참여를 법제화하는 학교 운영위원회가 전국적으로 구성이 되었고, ‘학부모회’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역별로 학교 학부모회 설치·운영에 관한 조례가 공포되면서 학부모회의 공식적 운영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학부모회는 여전히 과거의 ‘어머니회’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분위기이다. 학생을 중핵적 주체로 두고 교원과 학부모가 학생의 전인적 성장을 돕는 ‘좋은 어른’의 모습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학교 교육에 참여해야 하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못하다. 특히 국가가 주도하고 교사가 중심이 되는 지금의 학교 교육 시스템에서 학부모가 느끼는 학교의 문턱은 높기만 하다. 실제 학교라는 공간을 학생과 교사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교사들이 여전히 많으며, 학교에 방문하는 일은 학교 측의 큰 배려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 여기며 한껏 고마워하는 학부모들도 많다. 학부모회는 여전히 몇몇 엄마들이 모이는 사적인 모임으로 치부되기 일쑤고, 학부모라는 존재는 자신의 자녀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 교육 문외한, 교육 문제 유발자라는 편견에 싸여 있다. 주체 의식은 무엇보다도 ① 학부모가 스스로를 교육의 주인공, 주체라고 인식해야 하고 ② 학부모를 교육의 주체라고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어야한다. 학부모는 과연 교육의 주체로 우뚝 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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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주체임을 인식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주체가 되기 위해선 노력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다. 우선 학부모를 교육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 자신들의 자녀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 후안무치한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사회 인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도록, 교육 현안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깊이 있고 대등한 토론이 가능한 역량 있는 학부모가 되어 보는 건 어떨까. 내 자녀만의 부모라는, 개인적 입장 너머로 교육을 바라보는 넓은 안목, 학생과 교사의 입장을 모두 고려한 성숙한 학부모로서의 모습……. 학교가 변하기를 기약없이 기다리느니, 학부모인 우리가 먼저 나서서 배우고 연습하며 훈련해 보는 것은 어떨는지.

 

교육 주체로서 그 역할을 성실히 해내는 것도 교육의 주체로 우뚝 서는 방법이다. 학부모회가 하는 핵심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친목 도모? 학교봉사? 학생회가 학생들의 대표 조직으로서 학생들의 생각을 묻고, 교직원회가 교직원들의 생각을 모으듯, 학부모회는 일반 학부모들을 대표하는 조직으로서 학부모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면 된다. 학부모회를 통해 수렴된 학부모의 공론은 체계적으로 학교교육에 반영이 될 것이다. 절차적으로 정당하고 내용상 타당성이 확보될 때 학부모회는 학교를 대상으로 그 지위와 위상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학부모회 총회 또한 학부모회에서 주체적으로 준비, 진행해 보자. 학부모회 총회는 전체 학부모들이 모이는 최고 회의체인데, 그것을 교사가 준비하고 진행하는 모양새가 우습지 않은가. 날짜와 안건들은 학교 측과 충분히 협의하되 총회 안내, 행사장 준비, 사회 및 진행, 뒷정리 등은 모두 학부모회가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또한 교사의 통사정으로 임원이 결정되거나 자녀가 임원이라 어쩔 수 없이(또는 당연하게) 학부모회장이 되는 행태는 이제 없애도록 하자. 자발적이고 민주적으로 학부모회 임원을 선출해 내고 그들이 학부모회 운영을 잘해 낼 수 있도록 적극 참여하고 돕는 것이 학부모가 주체적으로 바르게 서는 일이다.

 

학부모 학교 참여가 활발했던 학교라고 해서 그동안 문제 유발 극성 학부모가 없었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학교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그들은 어디든 존재한다. 다만 그 공동체만의 분위기와 문화가 그들로 하여금 센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압도’해 버리면 된다. ‘그들’이 대세가 되면 공동체 관계에 악영향을 주는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학교 민주주의가 잘 구현되는 곳에서는 ‘내 자녀 만을 향한 그들의 사사로운 욕망들’이 건강한 학부모들에 의해 적당히 차단되고 걸러진다. 공동체 의식이 수준높게 유지되며 그것이 학교 학부모들의 주류 문화로 자리 잡으면, 소수의 진상 학부모는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공동체 의식이 살아 있는 학부모들의 주류 문화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학부모들 끼리, 그리고 학부모와 학교와 일상의 소통, 그 시간이 충분히(!) 축적되어야만 의식 있고 경험 많은 학부모들의 문화가 만들어진다. 의식 있는 학부모 리더가 존재하고 집단 지성이 살아 있는 학부모회 문화가 갖추어진다면 우리는 더욱 당당하게 교육의 주체가 되어 교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곽경애 (부회장)

 

※ 오늘의교육 77호(2023년 11월·1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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