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6월호/378호] 지부지회소식_광주지부(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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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사무처 작성일23-06-16 16:20 조회374회 댓글0건본문
지금까지 이런 역사기행은 없었다
참학 활동가, 5·18 민주화운동 광주에서 만나다
참학 활동가들은 2023년, 43주년 5·18 광주 민중 항쟁 역사 기행을 통해 이 땅 민주주의역사와 투쟁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아침부터 광주지부 이경숙 사무차장은 온 동네 마트를 돌고, 전화기도 돌고, 토마토가 이곳은 작고, 그래서 저곳으로 가야 한다고, 빵집에, 과일가게에 간식 마련으로 애썼다. 미리 달려간 5·18 국립묘지 입구에선 불교환경연대 시민단체에서 518개의 주먹밥을 만들어 ‘고래 고래’ 드시라고 권했다. ‘고래 고래’ 소리가 신호인 듯 서울, 김해, 경북, 경남 우리 회 활동가들이 반짝반짝 오셨다. 일회용 대신 환경을 위해 김에 싸여 있는 주먹밥도 맛있었다.
5·18 민주 항쟁은 1980년 5월, 12·12사태와 당시의 군부에 의해 벌어진 정권 장악 음모에 대항에 일어난 전국적인 저항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자행된 대표적인 반민주 학살사건이며, 이에 저항한 시민 민주항쟁이다
우리 회원이자 역사의 달인이신 서부원 선생님도 일찍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다. 특히, 경북, 경남에서 오신다 하니 엄청 반가워하셨다. 지금부터 숨도 못 쉴 정도로 모든 것을 쏟아내실 역사를 받으라고 일타 역사 강사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광주에 사는 우리는 5·18 역사가 늘 곁에 있었고, 이미 여러 번 참배했지만 다녀본 장소를 다시 돌아본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서부원 선생님이 걸음 걸음마다 새겨진 5·18 국립묘지를 전할 때 무심코 지나쳤던 시민 저항운동이 어떻게 권력자의 언어로 왜곡되고, 지워지려 하는지 알게 되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5·18 광주에서 살아있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문해 보았다. 민주묘지에 묻혀 있는 한승헌 인권 변호사의 묘비명이 답해 주는 듯했다.
‘자랑스럽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럽게 살지는 않겠습니다.’
제일 먼저 임을 위한 행진곡에 맞춰 추모식을 엄숙히 마쳤다. 서부원 선생님은 그날에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오른쪽에 있는 80년 5월 불법과 불의에 저항해 총을 들고 항쟁에 나섰던 시민군을 형상화한 무장 항쟁군 상이 아니라 슬픔을 딛고 승리를 노래하며 질서와 치안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대동세상의 모습을 묘사한 대동세상군 상 같은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민주화 운동 역사의 효시라는 4·19 혁명과 유신 독재정권의 붕괴를 가져온 부마 민주항쟁, ‘절대 공동체’의 원형을 보여 준 5·18의 뜨거운 역사가 잊혀감을 안타까워하셨다. 그 중에도 5·1 8 민주화 운동의 역사, 신군부의 폭력에 민주주의를 외치던 무고한 이웃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 분노했고, 수만 명이 광장에 모여 슬픔을 나눴고 연대를 다짐했고, 중고생은 물론, 초등학생에게까지 총부리를 겨눈 그들에 맞서 10대의 앳된 아이들까지 마지막 항쟁지인 전남도청에 의연히 걸어 들어가 죽음을 맞이했다. 사건으로 5·18 당시 신군부의 만행이 평범한 시민을 민주 투사로 변모시켰다 했다.
이웃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불의에 맞선 저항이 곧 민주주의와 인권의 핵심이라는 점을 시민들은 스스로 체득했고, 희생자와 가해자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5·18 사적지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금언이 새겨져 있다 하셨다.
계엄군이 도시 외곽으로 물러난 뒤 전남도청이 그들의 손에 진압될 때까지 닷새 동안 광주는 공동체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경찰과 행정 공무원 등이 모두 손을 놓은 치안 부재 상태였음에도 강력 사건은커녕 그 흔한 절도 사건 하나 발생하지 않았다 한다. 1980년 광주가 사회학자들로부터 ‘절대 공동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계기였다한다.
제2망월묘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불의와 폭압에 대한 불굴의 저항정신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민족운동인 의병활동, 동학농민운동, 3·1 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등 7개의 부조 조형물의 맥락에 대해 어이없어 하고 이것이 권력에 맞춘 역사해석이라 하셨다. 인과관계 속에서 역사를 잇는 해석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빠져있는 부마 민주항쟁과 5·18을 잇는 것이야말로 5·18의 정신을 구현하는 일이다 말하였다.
서부원 선생님의 생생한 역사해설에 우리 활동가들은 다음에 부마 민주항쟁 등 역사기행을 우리 회 계기 연수로 하면 좋겠다는 제안도 나왔다. 무등산의 무등(無等)처럼 권력이 있든 없든, 이름이 있든 없든, 다 동일한 규격으로 묻힌 곳이 국립 5·18묘지의 뿌듯함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곳에 참배 와서 모두가 알고 있는 유명(?)한 묘들만 보지 말라고, 이곳에 묻힌 모든 이들은 다 사연이 있는 것이라고, 계엄군의 구타로 숨진 청각 장애인, 부모님이 생일선물로 사준 신발이 벗겨져 주우러 가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11살 초등학생, 친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미안한 마음에 도청에 들어갔다가 주검으로 발견된 고등학생, 다친 시민들을 위해 헌혈한 뒤 병원에서 나오다 총에 맞아 숨진 여학생, 그리고 광주학살을 증언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학생과 시민들,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많은 이들이 왜 이곳에 잠들어있는지 자문자답하다 보면, 교훈이 저절로 가슴에 아로새겨지게 될 것이라 했다.
선생님은 민주주의란 결코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는 것을 친구와 이웃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함께 어깨 걸고 맞선 행동이 곧 민주주의 아니겠냐고 말했다.
우리는 짧은 일정 때문에 5·18 민주묘지에서 2시간 밖에 있을 수 없어 아쉬웠다. 그곳은 몇 날 며칠을 머물러도 다 둘러볼 수 없는 가슴 벅찬 역사의 현장이었다.
다음을 또 기약하고, 서둘러 마지막 항쟁지인 옛 전남도청과 전일빌딩을 가 보았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맥을 끊기 위해 전일빌딩을 허물어 245발의 헬기 사격의 진실을 부정하고, 대법원의 판결까지 난 사안인데도 여전히 ‘북한군 침투설’ 등 가짜뉴스가 횡행하는 현실을 활용하려는 정부의 역사 지우기를 목격했다. 특히, 5·18을 문제 삼는 건, 4·19혁명으로부터 6월 민중항쟁을 지나 촛불 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운동의 맥을 어떻게든 끊어보려는 짓이라 한다.
선생님은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특히, 학생들이 5·18 민주화운동 역사기행을 받드시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전두환이 뽑아버렸던 것을 다시 찾아 세워 놓은 시계탑만이 용용하게 오후 5시 18분이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 함께 한 우리 회 활동가들의 가슴에도 붉게 기억되고 있었다.
다음에는 우리 회 회원들 전체가 ‘가자 5·18 광주로!’ 함께 하길 바라보았다. 갈 길이 멀어 급한 저녁만 먹고 작별 인사를 했다. 우리는 5·18 광주의 진실을 오늘 보고 느낀 그대로 회원들에게 전할 것이다. 우리의 발걸음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 투쟁으로 인증해 보았다.
김경희 (광주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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