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신문/ 교육자치시리즈1] 알기 쉬운 교육자치 강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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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사무처 작성일20-07-02 15:45 조회2,965회 댓글0건본문
학부모신문 341호~343호 교육자치면에는 교원대 김용교수님의 교육자치에 대한 글을 3회에 걸쳐 실렸습니다.
좀 더 명확하게 교육자치에 대한 개념을 다루고 있는 글입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알기 쉬운 교육자치 강의 1
이 지면을 통하여 교육자치의 역사와 전개, 그리고 쟁점을 차례로 다룬다. 첫 회에는 교육자치 제도의 기원을 되돌아본다. 이 과정에서 교육자치의 골간을 이루는 교육감 제도는 물론 교육위원회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본다. 두 번째 글에서는 오랫 동안 논란을 거듭해 왔던 교육자치 제도의 형식을 둘러싼 갈등을 성찰한다. 이른바 분리형 자치와 통합형 자치가 어떤 문제를 중심으로 대립하여 왔는지 검토하고, 지금 시점에서 그 대립을 평가한다. 마지막 글에서는 교육감 직선제 시행 후의 교육자치의 변화상을 살펴보고, 앞으로 제기되는 과제를 검토한다. |
교육은 한 가정을 넘어 지역 공동체가 함께 감당하여야 하는 일이다. “아이를 기르는 일은 온 마을 사람이 거들어야 한다”는 격언이 이런 뜻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운영하고 있는 교육자치제도는 일정한 지역을 근거로 교육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관한 주민들의 의사를 집약하여 제도화한 것이다.
한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마을을 형성하면, 마을에서 주민들이 공동으로 교육을 운영할 필요가 발생한다. 마을 아이들을 위하여 교사를 임용하고 학교를 설립하여야 한다. 또 교육비를 마련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을 주민 모두가 모여서 직접 민주주의 방식으로 결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 주민들은 생계를 영위하느라 바쁘고, 결정할 내용이 많아질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복잡해지면 주민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고 그들에게 교육에 관한 의사결정을 맡기게 된다. 선출된 대표들은 주민 의사를 수렴하고, 이것에 따라 의사를 결정한다. 이들 모임이 오늘날 의결기구로서 교육위원회의 기원이 된다. 교육위원회는 주민으로 구성되고, 지역 공동체 이해를 대변하거나 그 공동체 가치를 구현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는다. 이런 연유로 교육위원회 구성에서는 대표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된다.
교육위원회에서 의사가 결정되면, 누군가는 그 일을 집행하여야 한다. 초기에는 교육위원 중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 집행을 관장하기도 하였으나, 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전문성을 갖추었다고 판단한 사람을 교육위원회에서 고용하여 그에게 집행 책임을 맡기게 되었다. 이렇게 고용된 사람이 오늘날의 교육감이다. 교육행정에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교육감으로 선호되었고, 교육위원회는 고용자로서 교육감을 통제하였다. 여기까지는 미국 이야기이다. 타운 미팅(town meeting)으로 시작한 마을 의사결정기구가 교육위원회로 발전하고, 19세기 말 취학 아동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학교행정이 복잡해짐에 따라 교육위원회와 교육감 역할이 분화하기 시작하였고, 교육행정 전문성을 근거로 교육감 역할이 점차 강화되었다.
일찍이 조선에서도 교육은 지방의 중요한 일이었다. 지방에 파견되는 수령의 으뜸가는 과제는 권농(勸農)과 권학(勸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개념으로 보자면 일반행정에서 교육행정을 분리 독립시켜야 한다는 관념은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고, 실제로 운영된 예도 찾아보기 어렵다. 일제 말기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을 정점으로 각 도에서는 학무과에서 총독부 관리들이 교육과 시학 업무를 관장하였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국가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천왕의 명령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일본의 행정 체제에 두려움을 느꼈던 미국은 지방자치가 일본을 변화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제도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전쟁 전에는 ‘학도병’이 상징하는 것처럼 전쟁과 교육은 밀접 불가분하게 운영되었기 때문에, 교육을 일반행정에서 분리시키는 일 역시 중요한 과제로 여겨졌다. 중앙정부로부터 지방정부 독립을 보장하고, 일반행정과 교육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일이 긴요하다. 이런 배경에서 교육자치가 온당한 제도적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미 군정 관리들은 한국에 대해서도 일본과 비슷하게 상황을 인식하였다. 해방 직후 한국의 교육행정체제를 대단히 중앙집권적이고 내무행정에 교육행정이 완전히 종속되어 정치 상황에 따라 교육 자율성이 침해될 소지가 다분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런 상황 인식에서 미 군정은 1948년 8월 12일 군정의 ‘마지막 선물’로서 ‘교육자치 3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들 법령은 일반행정 구역과 동일하기는 하나 독립성을 부여받은 교육구를 두고, 교육구 내에서 의결권과 집행권을 함께 갖는 교육구회를 설치하며, 교육재정 자립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였다. ‘교육자치 3법’은 전형적으로 미국식 교육자치 제도를 한국에 도입한 것으로서, 내무행정으로부터 교육행정을 분리, 독립하고, 권력을 지방에 분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었다. ‘교육자치’를 전제로 ‘지방자치’를 강조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미 군정은 정부 수립 후의 대한민국 정부에 ‘교육자치 3법’ 내용을 교육법 제정에 반영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제정 교육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규율되었다. 첫째, 군에는 교육구를 둔다. 교육구에는 교육과 학예에 관한 의결기관으로서 교육위원회를, 집행기관으로서 교육감을 둔다. 둘째, 특별시 및 시에는 교육위원회와 교육감을 두었다. 시 교육위원회는 교육과 학예에 관한 합의제 집행기관이었으며, 최종 의결기관은 시 의회였다. 교육위원회 사무장 격으로 교육감을 두었다. 시에는 교육구를 두지 않았다.
처음 발족한 교육자치 제도에 대하여 교육계 내, 외부에서 비판이 가해졌다. 내무관료들을 중심으로 일부 인사들은 지방교육자치제 폐지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지방교육자치제는 종합행정 원칙에 위배되어 행정 능률을 저해하며, 기구 팽창으로 재정 낭비를 초래할 것이며, 민도가 낮고 자치 전통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에는 맞지 않다는 점을 들어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문교부 관료와 전국 교육위원, 대한교육연합회(현재 한국교총 전신) 등이 중심이 되어 지방교육자치제 수호를 위한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자유당 정부 말기 정치 권력이 교육을 지배하여 각종 반민주적이고 비교육적인 일이 일상사가 된 경험을 한 후에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자주성, 그리고 전문성이 중요한 가치로 부상하고, 교육자치제도는 이들 가치를 담지한 상징과도 같은 제도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교육자치제도를 둘러싼 1950년대 초의 대립 구도는 7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분리형 교육자치를 유지할 것인가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교육자치 운영 제도를 둘러싼 갈등은 그 뿌리가 상당히 깊은 셈이다.
김용(한국교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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