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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6월호/355호]다시 돌아보는 ‘5 ·18 민주화운동’(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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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사무처 작성일21-07-07 18:48 조회1,2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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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보는 ‘5 ·18 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5 ·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79 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18년간 대한민국을 철권통치하던 독재자 박정희는 자신이 키운 충견 김재규가 쏜 총에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독재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당시 전두환 합동 수사본부장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시킨다. 

 박정희가 살아생전 군부에 키워놓은 사조직 하나회가 전두환을 중심으로 12·12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시각 수도 방위 사령부는 ‘지금 서울로 들어오는 놈들은 반란군’이라며 설명을 하였고, 수도경비 사령관 장태완은 쿠데타를 막으려고 고군분투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박희도가 이끄는 제1공수여단이 국방부와 육군 본부를 장악하여 쿠데타에 성공하였고, 결국 그로 인하여 ‘5·18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5 ·18 민주화운동’ 혼란의 원인은 정치인이나 국민들이 아니었다. 국방을 지키고 국민들을 보호했던 군인들을 몰아내고 불법적으로 권력을 탈취한 신군부가 혼란의 주범이었다. 신군부의 대표적인 인물은 노태우, 전두환이었으며, 이들은 박정희의 충실한 부하이기도 했다. 

광주시민들은 신군부의 잔인한 폭력에 맞서 싸웠고 그 싸움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싸웠다. 광주시민들은 서로를 지키려고 단단해졌으며, 다쳐서 아픈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헌혈을 실천했으며, 주먹밥을 만들어 서로 나누어 먹었다. 이러한 광주시민들을 신군부는 ‘폭도’, ‘빨갱이’라고 불렀다. 

 이때 당시의 언론은 막혔으며, 언론 기사도 마음대로 못쓰게 하였다. 언론에 나오는 것도 다 허위사실이었으며, 당시 권력을 잡았던 전두환의 명령에 따라 기사도 하나 제대로 못 쓰고 보도하지 못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되찾으려는 광주시민들 약 154명이 돌아가셨으며, 실제로는 더 많은 사상자 약 5,000여 명의 시민들이 돌아가셨다. 

 아직까지도 ‘5 ·18은 북한 특수군 600명이 일으킨 게릴라 전쟁이다’라 고 말하지만 지만원 군사평론가를 비롯해 ‘80년 광주 폭동이 10년, 20년 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에 의해 민주화 운동이 되었다고 주장하시는 분도 계신다. 결국 '5·18 민주화운동'은 광주시민들이 다시 민주주의를 찾을 수 있는 길이 되었으며, 5·18 특별 법을 제정해 전두환, 노태우 등 92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로 법의 심판을 받게 한 사건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무등산의 한자락에는 망월동 시립 묘지가 있다. 이 묘지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과 이름 없는 무명 열사 등 많은 분들의 시신이 이곳에 묻혀있다. 최근에는 김남주 시인도 이곳에 잠들었다. 그리고 국립 아시아 문화전당과 옛 전남 도청이 함께 있는 (현) 충장로에는 5·18 추모곡, ‘임을 위한 행진곡’이 시계탑에서 새벽 5시 18분과 오후 5시 18분 총 2번 크게 울려 퍼지며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이는 ‘5·18 민주 항쟁’의 희생자분들을 기리기 위해서 항상 5시 18분마다 울리는 것이다. 

이혜승 (청소년기자단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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