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11월호/360호] 대학입시의 문제, 그리고 나의 대학입시 거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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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사무처 작성일21-11-05 14:16 조회1,136회 댓글0건본문
대학입시의 문제, 그리고 나의 대학입시 거부
서울 가는 길
2018년 11월 22일의 일이다. 수능을 하루 앞둔 그 날,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그 날 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로 가는 열차였다. 대학입시 거부라는 이름으로, 삶의 한 단락을 마무리 짓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실은 것이다. 지방에 살던 나는 청계광장에서 열기로 한 대학입시 거부 기자회견과 퍼포먼스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가야 했다. 열차 객실 안에는 열선이 깔려 있는지 바깥과 달리 꽤 훈훈했다. 객실에서 내 자리를 찾았다. 티켓을 보고 숫자에 맞는 자리를 찾아가는 틈에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얼굴이 보였다. 옆 사람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든 사람, 책을 읽고 있는 사람, 군복을 입고 팔짱을 낀 사람……. 나는 그 들을 눈으로 훑으며 새삼 감상에 잠겼다. 이렇게 다양하면서도 각자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사람들이 한 열차에 타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가 소중하고도 놀라웠다. 이 보잘것없는 무궁화 객실에서 서로가 서로를 만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쳐왔어야 했을까. 나는 그날 열차 안에서 더 깊이 생각에 잠겼다.
모든 존재가 그렇다. 우리 모두는 감정을 느끼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고통과 환희를 주고받는 그 자체로 고유한 존재들이다. 누구 하나 허투루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대체 불가능하고 모두가 소중하다. 그러니 이들이 어떤 인연으로 인해서든 여기 무궁화 객실에 모였다는 사실 자체로 감격스러운 일이다. 무궁화 객실 하나에 72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한다. 객실이 만석이라면 일흔 두 개의 고유한 존재가 무궁화 한 량에 들어가는 셈이다.
어쩌면 진부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최근 많은 사람이 잊고 지내지 않았을까. 모든 존재가 소중하다는 당연한 전제를. 대학입시 거부에 이르게 된 경위를 설명할 때마다 나는 여기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내게 모두가 소중하다는 전제는 지상명령이었다. 대단한 사회사상에 기반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따지자면 조금 문학적인 구석이 있긴 했는데, 어쨌거나 모든 존재가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굳게 믿어왔다. 나의 대학입시 거부는 모든 존재가 소중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였다.
질적 가치의 양적 환원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에는 모든 존재의 가치가 양적으로 환원되고는 한다. 마늘 한 접 얼마, 대파 한 단 얼마 하는 식이다. 요컨대 시장에서 교환하기 위해 교환가치를 따지는 것이다. 분명 이런 방식은 편리한 데가 있다. 마늘과 대파에 가격표가 없다면 매 끼니를 먹기 위해 시장에서 흥정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매 끼니 마늘과 대파 없이는 뭘 해먹기 힘든 한국인 의 관점에서는 마늘과 대파가 언제든지 시장에서 거래 가능한 상품이어야 한다. 문제는 이와 같은 가치의 양적 환원이 사람에게도 예외가 아니게 된 현 실이다. 너 얼마짜리 인간, 하는 식으로 사람에 가격을 매기기 시작했다. 연봉 1억 원짜리 인간, 연봉 3,000만 원짜리 인간 하는 식이다. 분명 이런 방식마저 ‘편리한’ 데가 있다. 마늘이나 대파처럼 누가 더 비싼 사람이고 누가 더 싼 사람인지를 따지는 데는 이런 방식이 편리하다. 실제로 우리 시대에는 사람의 가치를 양적으로 환원해 따지고 있다. 취업시장에서 그렇고, 결혼정보회사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사람에게 가격표를 매기는 방식이 편리하다고 했을 때, 그 편리는 누구를 위한 편리인가? 적어도 양적으로 가치 지워진 그 사람을 위한 편리는 아니다. 마늘과 대파에 가격과 등급이 붙어있는 것은 소비자를 위한 편리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가격과 등급이 붙어있는 것은 사람을 뽑는 쪽, 그러니까 국가와 자본을 위한 편리다. 국가와 자본은 사람의 가치를 양적으로 환원해야 편하다. 더 나은 상품을 사서 가공해야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다. 이 ‘상품’ 가공의 대상은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질적인 가치를 지닌 인간을 양적인 가치만을 지닌 인적 자원으로 환원한다. 우리 교육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 다. 자본과 국가가 가격과 등급이 붙 어있는 인간을 원할 때, 교육이 그 필 요를 충족시켜주고 있다. 우리 교육의 문제점은 질적 가치의 양적 환원이 자연스럽게, 또 상시적으로 일어나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질적 가치를 지닌 인간을 너는 1등급, 너는 9등급 하는 식으로 양적으로 환원한다.
질적 가치의 양적 환원을 국가와 자본이 주도하는지 아니면 교육이 주도 하는지는 명백하지는 않지만, 상호보 완적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국가와 자본 그리고 교육은 앞서거니 뒤서 거니 하며 인간을 최대한 양적인 가치로 환원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질적인 가치 그대로 두었을 때는 비교 불가능하던 인간의 가치가, 양적인 가치로 환원되는 순간 손쉽게 비교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1 등급인 사람과 9등급인 사람이 비교 되고, 둘 가운데 1등급인 사람을 국가와 자본은 당연하다는 듯 선호한다. 각자 고유한 질적 가치를 지니는 인간은 사라지고, 등급이 매겨진 인간만 이 남는다. 인간의 가치를 비교 가능 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는 돌이키기 쉽지 않을 정도로 그 무게가 무겁다.
질적 가치의 양적 환원은 다음과 같은 폐악을 낳는다.
첫째, 너와 나의 ‘차이’가 차이 그 자체가 아닌 누가 더 낫고 못 나은지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각자가 고유하다. 이 사실은 존재를 질적인 그대로 인식할 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존재를 양적으로 인식할 때는 수치에 기반해 더 낫고 못 나은지를 판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 등장하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는 문구를 떠올리게 하는 불평등이다. 차이는 차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둘째, 모두가 각자의 질적인 가치 대신 양적 가치의 개발에 몰두하는 나머지 존재의 개성이 사라진다. 예컨대 누가 더 나무를 잘 베는지를 두고 시험을 봐서 점수를 매긴다고 하면, 나무를 잘 심거나 나무를 잘 가꾸는 역량 같은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들은 자연스레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나무를 심는 사람도 필요하고 나무를 잘 가꾸는 사람도 필요하다. 나무를 얼마나 많이 베었느냐를 두고서만 점수를 매긴다면 세상에 필요한 다양한 역량들이 무시되고 짓밟힐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적으로 매겨진 가치가 마치 그 존재의 유일하고 진정한 가치인 양 호도된다. 수능에서 1등급을 받는 사람이 더 마음씨가 좋거나 협력을 잘 할 수 있 는 사람이 아닌 데도 마치 모든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양 여겨지고는 한다. 수능 점수가 그이의 유일하고 진정한 가치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인데, 이는 그이에게도, 그 주변의 이들에게도 결코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가 가진 다양한 역량과 특성이 수능 1등급이라는 양적 가치에 의해 폭력적으로 무시되고, 그 주변의 이들은 다른 가치를 제쳐 두고 수능 1등급을 쟁취해내는 일을 지상명령으로 여기게 된다.
대학입시 거부
대학입시는 지금의 교육이 어떻게 인간의 가치를 양적으로 매기느냐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어느 대학에 가느냐를 두고 사람의 가치를 가늠하게 만든다. 어느 대학 갔느냐, 대학에 갔느냐 안 갔느냐를 두고 몇 점짜리 인간인지, 누가 누구 보다 나은지를 비교한다. 평등은 이렇게 무너진다.
나는 나의 가치가, 우리 모두의 가치가 결코 양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그리고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질적인 가치를 양적으로 환원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질서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학입시 거부를 한 것도 그래서였다. 물론 대학입시 거부에 이르기까지는 숱하게 고민하는 과정이 있었고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다. 하지만 누가 대학입시 거부를 왜 했냐고 물으면 꼭 이렇게 답하고 싶다. ‘양적 가치를 질적으로 환원하는 교육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라고.
대학입시 거부는 대학입시로 대표되는 총체적인 기성의 가치를 거부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내게 그 기성의 가치란 질적 가치의 양적 환원이었던 셈이다. 2018년 11월 23일 오전, 우리는 청계광장에 모였다.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그 해 대학입시 거부자들의 제안은 ‘멈춰서자는 것’이었다. ‘멈춰서자,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자’라는 슬로건 이었다. 2018년 당시 대학입시 거부 선언문을 조금 옮겨 본다.
“그러기 위해 이제는 멈추어야 합니다. 멈추어서, 경쟁과 차별의 논리를 넘어서는 대학에 대해, 교육에 대해, 우리 삶에 대해 새로운 고민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무엇이 올바르고 좋은 사회인지 그러한 고민들을 되찾아 오고 싶습니다. 하나씩 천천히 생각하고, 사회구성원이 이러한 고민을 함께하도록 할 때, 우리는 불안과 강요로 작동해 온 경쟁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다채로운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자유롭게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고민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시작입니다. 고민의 전환은, 새로운 시대 의 시작입니다.”
나는 그 당시 우리가 외쳤던, ‘멈춰 서자,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자’라는 슬로건을 이렇게 읽는다. 자본과 국가, 무엇보다 교육이 우리의 존재에 점수를 매길 때, 그러니까 우리를 경쟁붙일 때, 바로 그때 경쟁에 치열해지는 대신 함께 멈춰 서서 우리의 질적 존재를 지켜보자는 의미로 말이다. 한 사람이 멈춰 설 때 그것은 그저 의견의 제시로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최대한 함께, 어깨를 맞대고 연대하며 멈춰 설 때 우리를 경쟁시키고 우리에게 점수를 매기는 저 자본과 국가, 교육은 그제서야 우리와 마주 설 것이다. 우리는 그들과 마주 서서, 우리의 가치를 점수로 매기지 말라고, 우리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라고 말해야 한다.
돌아오는 길
2018년 11월 23일 밤, 본가로 돌아 가는 열차에서 또다시 사람들을 마주 쳤다. 지난 아침처럼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었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참 소중한 사람들이야, 하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창밖은 어둑어둑했다. 창밖이 어둑해지고 그에 비해 열차 안이 밝아지자 창에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그 근래로 한껏 구겨져 좀체 펴지지 않던 얼굴이 조금 펴져 있더라. 후련했나 보다. 내 삶의 어느 한 시기를 대학입시 거부라는 이름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의 대학입시 거부로부터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간 나는 새로운 숙제를 집어 들게 됐다. 바로 대학입시 거부의 정신을 붙들고 사는 일이다. 나는 대학입시를 거부함으로써 나를 양적으로 환원하는 사회의 질서를 거부했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내 삶에는 나의 가치를 양적으로 환원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다. 당장 아르바이트 하나를 얻으려 해도 학력은 어떤지, 경력은 어떤지 내 양적 가치를 따지려 든다.
어쩌면 모순일지도 모른다. 질적 가치의 양적 환원은 교육현장뿐 아니라 사회에도 숱하게 일어나는데, 그러면 아예 사회 전체를 거부해버리지 그러냐는 비아냥도 들었다. 쓸모없는 지적은 아니다. 실제로 나는 모순에 시달리고 있다. 대학입시 거부까지 했으면서도 정작 책을 살 때 저자의 학력을 확인할 때도 있고, 내 안에 절어있는 학력·학벌 차별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모순 투성이다. 그러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시달리는 사람의 삶은 무한히 더 풍부하다.” 모순 앞에서 풍부한 삶을 위하여 오늘도 생각한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대학입시 거부가 내 삶의 방향을 견인해가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대학입시 거부 이후, 많은 문제가 내가 고민할 의제가 됐다. 기존에 고민했던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비진학 청년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학력·학벌 차별 철폐 및 사회권 쟁취가 내가 당면한 문제가 됐다. 아마도 대학입시 거부가 삶의 방향을 견인해간다는 것은, 대학입시를 앞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선택지가 무엇인지를 고민했던 것처럼 삶의 순간마다 내가 가장 단단해 질 수 있는 선택을 더해가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 나는 내 삶의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해나갈 테다. 그 길에, 당신이 누구건 간에, 함께해주었으면 한다.
김정래 (대학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활동가) https://hiddenba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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