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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10월호/371호] 청소년기자가 말하다_10월 부마민주항쟁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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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사무처 작성일22-10-07 15:00 조회5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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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부마민주항쟁

 

 1979년 10월 16일 전후로 부산과 마산에서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다. 부마민주항쟁은유신독재에 반대한 국민들의 시위이다.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당시 박정희 정권 때 유신체제가 만들어지고 독재가 진행되며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위기가 오며,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심한 때에 YH 무역 사건이 터지게 되며 생긴 민주 항쟁이다.

 YH 무역사건은 공금 횡령과 무리한 투자로 인해 빚더미에 오른 회사가 폐업하게 되면서 여공들이 생계유지가 어려워져 생긴 사건이다. 회사가 폐업한 후 시위를 하는 여공들이 기숙사에서 숙면에 취했을 때 기숙사에선 ‘기숙사를 폐쇄한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안내가 나왔다. 그리고 경찰들이 기숙사로 오게 되고 여공들은 기숙사를 막고 국회의원이 있는 신민당사로 갔다.

 

 여공들 187명이 신민당사 4층 강당까지 올라갔다. 농성시위로 호소를 하는 것을 들은 김영삼 총재는 마지막으로 신민당을 찾아준 것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며 “노동청장, 장관 다 부를 테니 우리 대화로 풀어봅시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정희 정권은 청와대에서 회의를 연 후 차지철의 말을 듣고 신민당까지 군대와 경찰을 보내서 여공들을 강경 진압하였다. 그렇게 여공들을 강제 진압하면서 노동자 김경숙이 경찰의 손에 떠밀려 4층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경찰들은 이것을 덮기 위해서 경찰이 진압하기 30분 전에 뛰어내렸다며 거짓 기사를 냈고, 유가족을 속이기 위해서 김경숙이 사망한지 이틀 후까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유가족들이 동의한 적 없는 김경숙의 부검까지도 끝나서야 유가족이 도착하게 되며, 화장을 하라는 경찰의 닦달에 장례식도 못하고 화장시켰다.

 당시 야당 총재였던 (前 대통령)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 정권 지지 철회 요구를 하며 저항을 했고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 총재를 국회의원 직에서 제명시킨다.

 

 부마민주항쟁은 여공들을 진압하며 사망한 노동자 김경숙으로 인해 민주주의를 되찾으려는 사람들의 큰 함성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의 처음 시작인 부산대에서 먼저 시위를 했는데, 부산대 학생 20명 정도가 먼저 시위를 시작하니 고등학생과 노동자 회사원까지 약 5만명에서 7만명이 거리로 나왔다. 그렇게 경남대 마산에서도 똑같이 시위를 시작하게 된다.

 

 부산과 마산의 국민들 모두가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박정희 정권의 철회를 요구한 사건이었다. 결국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정권은 연회장에서 차지철과 함께 김재규가 쏜 총알에 그 자리에서 죽고, 부마 민주항쟁도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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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승 (청소년 기자단 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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