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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5월호/366호] 교육계소식_어린이날 100년! 인권을 생각하다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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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사무처 작성일22-05-06 16:31 조회8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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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100년! 인권을 생각하다

 2022년 5월은 어린이날을 처음으로 주창한 지 100년을 맞는 달이다. 천도교 소년회가 중심이 되어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선포했다. 해방 후 1946부터 노동절과 겹쳤던 기념일을 5월 5일로 정해 기념하게 했다. 1920년대 들어 방정환 선생은 이전까지 그저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던 아이들에게 ‘어린이’라는 호칭을 정착시켰다. 인간으로서 인권이 존중받아야 함에도 농사일이나 가사 일을 돕거나 값싼 노동력으로 이용당했던 어린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일제에게 강점당한 암울함 속에서, 결국 이 땅의 독립을 가져올 중요한 주체는 어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라는 ‘인내천’ 천도교 철학은 어린이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해야 하며 이것이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어 어린이날을 기념하게 된 계기였다. 이처럼 어린이에 대한 존중과 존엄을 강조한 ‘어린이날 선언’은 어린이를 하대하지 말 것과 어린이에 대한 경어 그리고 어린이 놀 권리를 충분히 보장해 줄 것 등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본질적으로 보면 1922년이나 2022년이나 어린이 인권에 대한 고민이 동일선상에 있어 보인다.

첫째로 우리 어린이들이 놀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경쟁 중심의 입시제도로 인한 성적 지상주의는 어린이들을 학원으로 내몰며 놀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 충분한 놀이 공간과 시간 그리고 놀 수 있는 친구를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부모들 역시 성적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어린이들은 놀면서 협업과 사회를 살아가는 규칙, 서로에 대한 이해, 갈등 해소 방법 등을 배우며 익힌다. 그만큼 놀 권리 보장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아주 중요하다. 1920년대 당시 어린이들이 노동으로 내몰리거나 무관심한 존재여서 놀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상황이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우리 어린이들이 권리를 박탈당함에는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둘째 사회의 참정권으로부터 배제이다.

국민의 구성원으로 참정권을 보장받는 것은 존엄이고 인권이다. 우리 학생들은 학교 생활규정을 만들거나 수정할 때 학생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는 것을 거의 경험해 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학교생활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교육감을 뽑는 자리에도 교육과 전혀 관계없는 성인들은 선거권이 보장되지만 당사자들은 그러하지 못하다.

우리회가 참여하고 있는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가 정치권에 요구하고 있는 교육감 선거연령 만 16세와 시도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기득권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고 있다. 이 역시 1922년 당시 어린이를 비롯한 청소년 인권 상황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셋째 청소년과 어린이의 수단화이다.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선언을 보면 ‘장가와 시집 보낼 생각을 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라는 말이 나온다. 당시 결혼을 통해 노동력을 충원하거나 집안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어린이를 활용해 선언문에서도 언급했을 것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아이들이 아이답게 성장하는 것을 돕기보단 오직 명문 대학이나 의대 등을 꿈꾸게 하며 부모의 희망을 아이들을 통해 수단화하고 있는 것이 현대 사회의 경향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른가?

다시 맞이하는 어린이날 그리고 100회, 시쳇말이 아니라 어린이는 정말로 미래사회를 위한 소중한 싹이다. 처음 싹은 모두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싹이 성장해 사과나무가 될지 배나무가 될지 또는, 많은 사람을 쉬게 해줄 큰 그늘을 만들어 줄 나무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어린이들이 꿈과 끼에 맞게 성장하기 위해,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협업하며 창의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어른들이 인내와 의연함으로 어린이들을 지켜주고 바라봐 주길 바란다.

윤영상 (수석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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