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1월호/384호] 정책_공정을 가장한 통제, 공교육을 거부한다(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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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사무처 작성일24-01-11 15:50 조회345회 댓글0건본문
공정을 가장한 통제,
공교육을 거부한다
국가 행사, 수능
2023년 11월 16일, 대한민국 최대의 행사인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이 끝났다. 수능 시험에 방해될까 봐 비행기가 못 뜨고 군사 훈련도 멈추는 한국의 모습에 외신들은 ‘셧다운’이라고 비웃었다. 올해는 심지어 천둥·번개까지 등장했다. 1993년 수능 시행 뒤로 ‘비 오는 수능일’은 처음이라며 교육부는 듣기평가 시간에 천둥·번개가 친 곳은 재방송을 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수능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도 수능 관련 민원은 끊이지 않는다. 감독관이 기지개를 켜서 시험을 망쳤다, 복장이 너무 화려해서 신경 쓰였다, 매뉴얼 종이 넘기는 소리가 시끄러웠다는 것부터 종료 타종이 1분 30초 일찍 울렸다고 서울 A고에서 시험 본 수험생들의 집단 소송 준비까지…. 수능 후폭풍은 해를 거듭할수록 거세지는 것 같다.
입시 무대 뒤에선
반면, 요즘엔 입시 때문에 자살했다는 청소년의 기사는 찾기 힘들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혹시나 은폐된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기도 하다. 몇 년 전 지인의 학교에서 수능 자살 사건이 있었지만 학교에서 언론 접촉을 통제했다는 제보를 받은 적이 있다. 해마다 이런 비보는 동네마다 쉬쉬하는 ‘소문’으로 무수히 떠돈다.
2023년 9월 8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의 활동가 ‘난다’는 “언론에 많이 보도되지 않는다고 해서 청소년들의 자살이 그만큼 줄어들거나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 들어 청소년 자살률은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10대 청소년의 사망원인 1위는 자살(고의적 자해)이고, 그 수는 2020년 315명, 2021년 338명에 이른다. ‘2022년 자살예방백서’ 자료도 최근 청소년(9~24살)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017년 7.8명이었다가 2020년에는 11.1명으로 증가하고 있다. 청소년 자살 문제를 입시 제도나 학교폭력 등과 관련지어 주목하던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의 수치에 비해 감소하지 않았거나 더 증가했다. 언론에서 보도가 줄어든 뒤로 과거에 비해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마저 없어진 것은 아닐까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청소년의 죽음은 개인 탓
청소년은 베르테르 효과라고 부르는 자살 전염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김현수, 『대한민국 교육 트렌드 2024』, 에듀니티, 2023) 한국기자협회의 ‘자살보도 권고기준’에서는 “자살 사건은 되도록 보도하지 않는다”, “자살 사건은 주요 기사로 다루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자살 동기를 단순화하여 보도하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청소년의 죽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독 청소년의 죽음이 ‘나약하고 무능한 개인의 탓’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짚어봐야 한다. 잘못된 교육 제도와 불평등한 사회 구조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한날한시에 똑같은 문제로 보는 ‘공정한’ 시험에서 실패한 것은 온전히 개인의 잘못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유가족도, 학교도, 사회도 덮으려고만 하는 것이 아닐까.
통제를 위한 공정
현 중2 학생이 치를 2028 대학입시 개편안이 곧 확정될 예정이다. 교육부가 발표한 시안은 내신과 수능 모두 상대평가를 적용하고, 수능은 과목 선택권을 없앤 국·영·수·사·과 공통 과목을 치르도록 했다. 현 중3 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2025년부터 학생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된다. 이를 위해서는 적은 인원이 수강 신청을 해도 불이익이 없도록 내신에는 ‘절대평가’가 전제돼야 한다. 또한, 지금보다 수능 비중을 줄이든지 과목 선택권을 늘려야 입시 위주 교육을 벗어나 고교학점제가 정착할 수 있다. 그런데 교육부의 대입 개편안은 고교학점제를 무력화할 뿐만 아니라 주요 과목 위주의 획일적 교육으로 퇴행시켰다. 이렇게 구성한 이유에 대해 교육부는 ‘공정’을 내세우고 있다. 과목이 너무 다양하면 같은 기준으로 줄을 세우기 어려워 공정하지 않고, 절대평가를 도입하면 학교와 교사에 따라 성적 부풀리기를 할 수도 있어 공정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우리 사회는 자격증이 가장 공정하다고 인식한다.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시험을 치르고 1등부터 차례대로 줄을 세우는 것이 가장 공정하다고 가르친다. 줄을 세울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줄을 세울까를 고민한다. 앞줄에 서기 위해 받아야 할 사교육의 양이나 부모의 경제력, 지역적 접근성, 가족 구성원의 출신 국가, 개인의 신체적·정서적 요인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처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적인 통제를 ‘공정’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실패가 아닌 선택
매년 수능일에 맞춰 ‘대학입시 거부 선언’ 기자회견을 해 온 ‘투명가방끈’이 2023년 행사로 ‘대학 비진학자 가시화 주간’을 마련하고 수능 당일인 11월 16일 저녁, ‘우리들의 실패, 실패자들의 연대’ 축제를 열었다. 나는 수능을 치르고 김민재 선수 응원 피켓을 만들어 월드컵 축구장으로 달려간 고3 아들을 도와준 후 이 파티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입시, 졸업, 학교 생활, 결혼 생활 등에 실패한 각자의 ‘실패담’을 공유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실패’가 아닌 ‘선택’이었던 다양한 삶의 경험담이었다. 각자가 선택한 길에서 만난 숱한 경험들은 과정일 뿐이고 이를 ‘실패’라고 이름 붙인 건 당사자가 아닌 이 사회다. 이날 축제에는 완벽이 아닌 더딤을 추구하는 ‘더딤 밴드’, 조현병 당사자들의 ‘콩나물 밴드’, 평등한 춤 ‘모두의 훌라’ 공연도 이어져 사회가 붙여준 ‘실패자’ 딱지를 마음껏 즐겼다.
행사에서 나눠 준 포춘쿠키 안에는 참가자들이 미리 적어 둔 글이 있었다.
“대학 비진학자가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이, 사실은 대학 진학자와 입시생들에게도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해요.”
교육 기본통계에 따르면 2022년 한 해에 학업을 중단한 학생 수가 5만 2,000여 명에 달한다. 학교급별로는 초등학교 1만 9,415명, 중학교 9,585명, 고등학교 2만 3,981명이다. 더 이상 의무교육에 순종하며 국가 통제에 따르는 시대가 아니며, 산업인력을 양성하는 컨베이어 벨트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젠가는 ‘실패자’의 연대가 더 크고 단단해져 경쟁 교육, 불평등 교육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이윤경 (회장)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2023. 12. 5.)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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