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 300호 교육과정의 변천과 역사교과서 발행 제도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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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사무처 작성일16-11-02 16:41 조회1,19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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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우리 민족은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되었지만, 미국과 소련의 정략적 합의로 한반도는 다시남북으로 갈리게 되었다. 6-3-3-4 학제 및 교육목표, 과목 설정, 교과 편성은 미국의 영향을 받아 마련되었고 현재까지도 이러한 시스템은 큰 변동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미군정은 한국 상황에 대한 이해가 무척 낮은 상태였기에 일제 시기의 교재를 사용하지 말라는 정도의 응급조치를 취했을 뿐 체계화된 교육과정을만들지 못했다. 이 시기를 교수 요목시기 (1946 ~1954)라 한다. 교수 요목시기 역사교육은 민족국가건설을 열망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국사교육에대한 관심이 높았던 상황에 비해 체계적인 교재가준비되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일제 식민 사학의논리를 그대로 반영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역사교육에 국정교과서를 사용한다는생각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미군정에 의해 만들어진 교육과정이었기에 임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48년 정부 수립 이후 새로운 교육과정을짜려고 준비하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 새 교육과정은 1954년에 나올 수 있었다.
1차 교육과정(1954~1963)에서는 전쟁의 영향으로 반공을 강조하였지만, 국사교과서는 여전히 검정교과서 체제였다. 그러나 교과서마다 용어나 학설의 차이가 종종 나타나 이를 통일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는데, 이는 훗날 국가가 역사교과서를 통제하는 빌미로 작용하게 된다. 1차 교육과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은 1958년부터 시작되었으나, 실제로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정이 실시되는 가운데 추진되었다.
2차 교육과정(1963~1973)에서는 1960년대 개발 지상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가 부각되고 국민교육헌장(1968)을 공포하는 등 국민정신 통일과 국민을 국가 발전에 동원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면서역사교육을 ‘민족 주체성 확립을 위한 교육’을 내세우면 국사교육 강화 정책을 추진하며 국사 교과의독립, 모든 대학에서 국사의 교양 필수화, 국가 채용 고시에 국사 과목 의무화 등의 정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국사교과서 발행 체제는 역시 검정교과서 체제였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의 국사교육 강화 정책에 호응하여 대다수 국사학자들은 능동적이고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역사교육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통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1972년 유신 선포 이후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하면서 ‘국사교육강화위원회’를 만들어 소위 민족사관의확립을 강조하면서 초등학교부터 대학 교양과정까지 국사과목은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었다.이러한 정책은 3차 교육과정에 반영되었다.
3차 교육과정(1973~1982)은 국사 과목이 사회과에서 분리되어 독립 교과가 되었고, 수업 시수도 대폭 늘어났다. 재밌는 것은 1972년 문교부(현 교육부)는 국난 극복의 정신을 기른다는 명목으로 ‘시련과 극복’이라는 역사교재를 제작하여 전국 학교에 보급하였는데 이는 국정 국사교과서의 전초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 교재는 무인들의 국난 극복 정신을 높이 평가(특히 이순신의 영웅화 강조)하면서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박정희 정부를 미화하려는 의도를 보인 대표적인사례다. 3차 교육과정이 공포되면서 국사교과서는 국정체제로 바뀌었다. 민족 사관을 통일해 주체적 민족의식을 가진 국민을 기르는 데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또한 제작비용 절감, 교과서 질의 향상 등을 이유로 내세우기도 했다.당시 역사학계는 물론 국사교육강화위원회의 위원들도 반대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국정교과서의 사회적 평가는그리 좋지 못했다. 경제적 효과도 별로 없었고, 오히려 정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국가가 내용을 통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정부는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까지도 국정(당시에는 1종 교과서로 명칭)으로 발행하였다. 다만 국정 국사교과서
가 간행되면서 ‘시련과 극복’이라는 교재는 1979년사라졌다. 이 교재에 있던 내용이 국정 국사교과서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12·12 군사쿠데타와 5·17 계엄확대를 거치면서전두환 정부가 수립되고,
1981년 12월 31일 4차 교육과정이 고시되었다. 그러나 4차 교육과정에서도 국정 교과서 체제가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고등학교 세계사는 다시 검정 교과서 체제로 바뀌었다. 한편 국사 교과서는 분량이 늘어나면서 상·하권으로 나뉘어 간행되었다. 하지만, 국정 국사교과서의 역사 인식은 197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배층 위주의 서술과 반공 이데올로기는 그대로였으며 정권 홍보 내용도 마찬가지였다.이 시기 특징적인 것은 상고사 논란이 일었다는 것이다. 흔히 ‘재야 사학’이라 불리며 극단적인 민족주의 경향을 띤 일부 학자들이 한국의 상고사를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축소, 왜곡했는데 해방 이후에도 국사학계가그대로 받아들여 국사교과서에 서술했다고비판했다.집권 과정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는데 골몰하고 있던 전두환 정부는 이들의 주장에 관심을 기울여 이들의 주장 일부가 교과서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란을 거치면서 ‘국사교과서내용 전개의 준거안’이라는 집필 준거가나타나기 시작해 현재까지도 역사교과서의 내용을 국가가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5차 교육과정(1987~1892)에서도 여전히 국사교과서는 국정으로 발행되었다. 국정교과서 체제에대한 역사교사들의 비판적 여론이 일어나고 있었지만,정부는 묵살하였고 1987년 민주화운동의 성과도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다만 내용적 측면에서 용어 등의 변화 정도만 있을 뿐 기존의 4차 교육과정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6차 교육과정(1992~1999)에서도 국정 체제는그대로였다.1994년 6차 교육과정에 따른 새 교과서 집필 준거안 시안이 발표되면서 근현대사 내용을 둘러싼보수 우익 세력의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1980년대 이후 진보적인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면서 역사 용어의 변화를 둘러싼 반발이었다. 보수 단체들의 반발에 교육부는 과거의 내용과용어로 다시 바꾸어 무마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이념 전쟁의 시작이었다.1994년 김영삼 정부는 대통령 산하 교육개혁위원회를 설치하여 21세기를 준하는 신교육 체제를 만들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7차 교육과정(1999~ 2007)이 만들어졌는데, ‘세계화 시대’, ‘수월성’을 내세우면서 역사교육은 다시 사회과로 통합되고 선택과목으로 전락하면서 역사교육의 약화를 가져왔다. 국사교과서의 국정 체제 역시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선택과목의 확대로 ‘한국 근현대사’라는 과목이 새롭게 등장하였고 검정교과서체제로 발행되면서 역사교과서 발행 체제의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또한 2000년대 접어들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와 중국의 동북공정등 한·중·일 역사 갈등이 높아지면서 국정 역사교과서 발행이 걸림돌이라는 인식이 커지면서 일반국민들의 사이에서도 국정 발행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커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2007 교육과정에 이르러 국사 과목은 ‘역사’라는과목으로 바꾸고(세계사와 통합),발행 체제도 검정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래형 교육과정이라는 명분으로 ‘역사' 교과서를 다시 한국사와 세계사로 분리하여 ‘한국사’라는 교과서가 2011년에 발행되었다.하지만 ‘한국사’ 교과서는 검정 교과서 형태로 발행되었다. 국정이 세계적 흐름을 거스르는 발행 체제라는 것을부정하지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정부는 수시로 교육과정을 바꾸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역사교과서를 발행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2013년 뉴라이트의 시각을 담은 교학사 한국사교과서가 검정에 통과되었고. 2014년 각급 학교에서는 오류와 부실로 점철되고 편향적인 교과서를차마 학교 현장에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0%대 채택률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박근혜 정부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교과서가 퍼지길 원했지만, 그러지 못하자 다시 국정 역사교과서 발행 체제로 되돌리면서 독재시대로의 회귀를 꿈꾸는 시대착오적인 결정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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