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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문화 | 260호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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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사무처 작성일17-08-09 16:45 조회9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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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바뀔 수 있는 역사


​봄의 기운을 느끼기 어려운 4월 중순, ‘우리 역사를 더욱 빛나게 한 위대한 발견’ 이라는 주제로 전라북도 익산으로 역사기행을 떠났다.

첫 도착지는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도 많이 보았던 미륵사 터였다. 거대한 크기의 당간지주를 처음 만났다. 당간지주란 절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깃발을 달아 세우는 장대인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세운 두 개의 기둥으로, 이 절이 얼마나 컸으면 당간지주도 이렇게 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은 해체되어서 복원중인 서탑을 보았다. 미륵사 서탑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무너진 서탑을 복원한답시고 시멘트를 부어서 한쪽 면만 제대로 된 탑의 모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난 항상 미륵서탑을 한쪽 면만 보아서 이렇게 심하
게 훼손되어 있는 줄 몰랐다.

탑을 구경하고 나서 선생님께서 부연 설명을 해주셨다. 지금까지 미륵사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대로 서동요의 주인공인 무왕이 선화공주의 부탁을 듣
고 지은 절이라고 해석되어 왔지만, 미륵사 탑을 분해하면서 발견된 사리장엄에 의해 무왕이 지은 것이 아니라 백제의 어느 귀족이 자신의 재산으로 이
절을 만들어진 것이라고 밝혀졌다고 한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묘라고 추정되는 쌍릉으로 향했다. 약 200m의 거리를 두고 두 개의 묘가 있었는데 백제시대 7세기의 전형적인 형태의 굴식돌방 무덤이다. 이 무덤양식은 들어가는 입구를 만들어 놓아서 도굴이 잘 되었다. 하지만 신라는 돌무지 덧널무덤(돌을 쌓아 도굴을 쉽게 할 수가 없게 만든 무덤)을 만들어서 금관같은 유물이 많이 남아있다는 설명도 들었다.

점심을 먹고 고도리 석불입상을 보러갔다. 고도리란 옛 도읍지라는 뜻을 가진 마을이름이다.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자리의 조건이 산에 둘러싸인 곳이지
만 이 고도리마을은 남쪽이 뚫려있어서 남쪽을 막기 위해 석불입상을 세워 비보역할을 하도록 했다.

고도리 가까이 왕궁리 5층 석탑이 있었다. 이 석탑은 백제 것인지 신라 것인지 논란이 된다고 한다. 난 이 탑이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 같다. 통일신라사람이 백제 석탑의 모양과 신라 석탑의 모양을 서로 조화시켜서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왕궁리에서 최초로 화장실 터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나
와 친구들은 ‘백제 사람들은 무엇으로 뒤처리를 했을까?’ 궁금했는데 전시실에서 나무 막대를 이용해서 뒤처리를 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와우! 휴지를 만들어 주신 킴벌리라는 분께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화암사라는 절에 갔다. 화암사는 내가 다녀본 절중에서 가장 작고 포근했다. 이 절은 올라오는 길이 아름답고, 산속에 있지만 산중 사찰 느낌이 없고, 하앙식 구조 건물(지붕에 나무를 덧대 지은 양식)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번 역사기행은 기존에 있던 역사적 사실이 새로운 발견을 통해 바뀐 곳을 다녀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역사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역사는 답이 없는, 그러니까 답이 어떤 것이든 바뀔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이도희 (송원중학교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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